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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마녀사냥의 역사


안녕하세요? 화제가 되는 뉴스를 중심으로 역사를 더듬어가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얼마 전 한국은 난데 없이 남자들의 키에 관한 루저 파문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영어로 루저 (loser)는 실패자, 낙오자, 별볼일 없는 사람이란 뜻인데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다”, “남자는 키가 최소한 180 센티미터는 되야 한다”, 이런 발언을 해서 큰 논란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방송을 보고 분노한 남성들이 여대생의 신상을 캐면서 전화번호와 주소, 전자우편 주소 등 개인정보가 공개됐고요. 이 여대생이 다니는 대학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습니다. 화제의 여대생은 대본에 나와있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해명을 했지만요. 대중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는데요. 한 남성은 이 여대생의 발언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며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이처럼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분위기에 대해 인격살인, 현대판 마녀사냥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마녀사냥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둔 밤 외진 산이나 들판에 악마와 내통하는 자들이 모여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들은 빗자루나 동물의 등을 타고 날아와서 밤새 춤을 추며 잔치를 벌인다. 집에 돌아갈 때는 악마로부터 기름을 받는데, 그 기름은 아이들의 살로 만든 것이다.”

네, 바로 사바트, 마녀들의 집회에 관한 설명입니다. 여러분은 만약 이웃집 여인이 밤에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거나, 고양이로 변신해서 돌아다닌다고 얘기를 듣는다면 다들 웃으실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말이죠. 하지만 수백 년 전 유럽인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갑자기 가축이 죽거나,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프거나, 원인 모를 일들이 일어나면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무고한 이웃집 여인을 마녀로 몰아 재판에 회부하고, 온갖 고문을 가해 자백을 얻어낸 뒤 사형에 처했습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이 마녀로 몰려 처형됐고, 1597년에서 1676년 사이 9년 동안 약 2백 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1693년 소소크만텔에서는 2천4백 명, 1654년에는 1백 명이 처형됐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는 1564년에서 174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천8백여 명이 마녀 재판에 회부됐고, 그 가운데 3분의 2가 사형에 처해졌다.”

그렇습니다. 유럽에서 마녀사냥은 15세기에 스위스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기 시작해 17세기에 절정을 이뤘고요. 18세기 초까지 계속됐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3만 명이 마녀로 지목돼 목숨을 잃었는데요. 운이 좋은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해진 뒤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워졌지만,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마녀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 전까지는 마녀에 대한 탄압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요. 그렇다면 이 시기에 마녀사냥, 마녀재판이 대대적으로 이뤄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토욱스 교수//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 유럽이 큰 변환을 겪고 있었다는 겁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어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였거든요. 바로 그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마녀사냥이 일어났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때는 스트레스가 크기 마련이죠. 사람들이 압박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데요. 그 같은 사회적 스트레스를 마녀사냥을 통해 발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역사학과의 로라 스토욱스 교수는 마녀사냥이 당시 유럽사회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는데요. 변화에 대한 사회적인 불안감이 집단광기로 표출됐다는 것입니다.

//스토욱스 교수//
“이웃집에 사는 사람 등 보통 아는 사람에 의해서 마녀로 몰리게 됩니다. 그러면 지방 판사가 조사에 들어가는데요. 며칠씩 조사를 하면서 고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고문을 못 이겨서 거짓 자백을 하게 되죠. 마법을 써서 사람이나 가축을 죽게 했다며, 혐의를 인정하는 겁니다. 또한 혐의사실 외의 얘기까지 하게 되죠.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거나 다른 마녀들과 집회를 가졌다거나, 하지도 않은 일들을 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손가락을 죄거나 뜨겁게 달군 의자에 앉히거나, 가죽으로 묶어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등 고문 방법도 다양했는데요. 마녀재판관이 지녀야 할 이론과 고문방법 등을 상세히 기술한 지침서까지 나왔습니다.

“고문을 통해 심문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간수가 고문 도구를 준비하고 옷을 벗긴다. 이렇게 옷을 벗기는 이유는 혹시 어떤 마술의 수단을 옷에 꿰매 놓았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인기 도서였던 ‘마녀의 망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5세기말 수도사 야콥 슈프렝거와 하인리히 인스토리토스가 쓴 책인데요.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확산되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혐의자의 손과 발을 묶은 뒤에 강물이나 물통에 세 번 담그는 것으로 시험한다. 혐의자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마녀고, 반대로 오랫동안 물 속에 가라앉아 있으면 마녀가 아니다.”

마녀를 판별하기 위해 많은 방법이 동원됐는데요. 특히 피의자를 물에 빠뜨리는 방법이 유명합니다. 사람은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물에 빠지면 죽지 않은 이상 떠오르기 마련인데요. 떠오르면 마녀란 증거니까 사형에 처해졌고요. 떠오르지 않으면 무죄는 입증되지만 익사하게 되니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토욱스 교수//
“이 같은 방법들은 대부분 사법제도 밖에서 이용됐지만 정식 재판과정에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늘로 찌르기, 몸에 남아있는 악마의 표식 찾기 등이 있는데요. 긴 바늘로 찔러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마녀란 것입니다. 또 악마의 표식을 찾기 위해 마녀로 몰린 사람을 벌거벗겨서 몸 전체를 살폈는데, 이상한 점이 있으면 마녀라고 주장했습니다.”

마녀란 말은 있어도 마남이란 말은 없는 것처럼, 마녀사냥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습니다. 희생자의 85퍼센트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여성 탄압 사례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남성들 역시 마녀사냥의 광기를 피하진 못했습니다.

//스토욱스 교수//
“독일 밤베르크란 도시의 시장이었던 요하네스 유니어스를 들 수 있는데요. 1630년대에 밤베르크의 가톨릭 주교가 무시무시한 마녀사냥을 벌였습니다. 요하네스 유니어스를 비롯해 밤베르크 시의회 의원들 가운데 절반이 체포돼서 처형 당했습니다. 요하네스 유니어스는 감옥에서 몰래 딸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유명해졌는데요. 고문을 못 이겨 자백했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 수밖에 없었다며 용서를 비는 편지였습니다.”

일부에서는 당시 실제로 비밀집회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마녀사냥은 그런 이교도들의 모임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데요. 하지만 스탠포드 대학교의 로라 스토욱스 교수와 같은 현대 사학자들은 그 같은 견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스토욱스 교수//
“그런 생각은 20세기 초에 영국 학자 마가렛 머리가 쓴 책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요즘 역사학자들이나 마녀사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가렛 머리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머리는 실제로 당시 종교적 집회를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박해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요. 마녀로 몰린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저 보통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근대 유럽의 마녀사냥은 성직자나 귀족 등 상류층이 아니라, 민중이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스토욱스 교수//
“사회구조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유럽의 보통 주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한 겁니다. 동네 사람 중에 골치 아픈 사람을 없애버리는 거죠. 마녀가 아닌 줄 알면서 그랬다는 건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싫은 사람, 불편한 사람이 마녀라고 믿었던 거죠. 물론 성직자들과 판사들이 마녀사냥을 지지하고 장려하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마녀사냥이 지속된 데는 상류층의 죄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마녀재판의 종식은 위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고문에 의한 자백 등 마녀재판 방식에 의구심을 보이는 판사나 관리들이 늘어났고요. 이들은 마녀로 지목되는 사람이 있어도 재판에 세우길 거부했습니다. 또한 합리적 정신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이 전파되면서 18세기부터 유럽에서 마녀사냥은 점차 사라지게 됐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마녀는 저속한 미신이나 대중의 무지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스토욱스 교수//
“지난 몇 년 동안 아프리카 케냐에서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남아공화국에서도 여러 해 동안 마녀로 몰려 구타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었고요. 나이지리아에서도 끔찍한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마녀를 믿고 두려워하는 부족이 존재하는 거죠. 뿐만 아니라 마녀사냥과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1953년에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는 ‘시련’이란 희곡을 썼는데요. 미국 매사추셋츠 주 세일럼이란 곳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에 관한 내용이지만요. 당시 미국의 극단주의 반공산주의 활동인 매카시즘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입니다.”

지난 해 한국의 유명 여배우 최진실이 인터넷상에 떠돌던 소문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사건 역시, 일종의 마녀사냥이란 지적이 있었습니다. 스토욱스 교수는 근거 없는 소문이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근대 유럽의 마녀사냥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는데요. 증거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 마녀로 지목되면 꼼짝없이 죽음을 당했던 근대 유럽의 마녀사냥이나, 한번 낙인이 찍히면 사회여론이 그 쪽으로 몰고 가는 현대판 마녀사냥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마녀사냥의 역사와 배경을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유럽의 흡혈귀 전설에 관해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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