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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탈북 난민 100명 시대 특집] 데보라 씨의 도전 (2)


미국 내 탈북 난민 1백 명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지난 2004년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난민 지위를 받아 제3국에서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지난 9월 말 현재 93명으로 이르면 올해 안에 1백 명을 넘어설 전망입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는 탈북자 1백 명 시대를 맞아 어제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특집방송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2부는 어제에 이어 지난 2006년 처음으로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 데보라 씨의 정착생활을 소개해 드립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데보라 씨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지난 3년 반 동안 꿈을 좇아 직장을 다섯 번 옮겼습니다. 뷔페식당 웨이추레스에서 손발톱을 손질하는 네일 미용사로, 다시 변호사 사무실의 행정보조원, 미 대입 학력고사인 SAT 학원의 행정 담당자, 그리고 지금의 병원 간호보조사까지.

데보라 씨는 꿈을 향해 전진하는 꾸준함과 성실한 자세가 지금의 미국 병원에 취직한 원동력이 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 저는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 분들은 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열심히 일하면 그 것을 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들도 제가 영어를 하면서 더듬거리는 것 잘 알잖아요. 근데 저를 고용했다는 것은 그런 것 봐주시는 것 같아요. 꾀를 안 부리고 열심히 하고 진심을 보이면 그 사람들도 알아주는 것 같아요.”

데보라 씨의 근면함은 탈북자들이 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들어 한다는 영어 배우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 데보라 씨의 라디오 영어 따라 하는 소리들”

매일 새벽 1시간씩 영어책을 크게 읽는 연습을 하고 틈나는 대로 방송과 영화를 보며 생활 영어를 익히는 것이 이제 생활화 됐다는 데보라 씨.

“저는 아예 ABC 나 겨우 알고 파더, 마더도 제대로 못했어요. 근데 집에서 미국영화 많이 보고 그냥 즐기는 게 아니라 보기만 하면 말 안 하잖아요. 영화 볼 때 자막 나오는 거 보면서 배우들 말을 따라 해요. 혼자 보면서 Are You Crazy? 막 이렇게 보면서 Crazy? 하며 따라 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 책을 보며 소리 내며, 눈으로만 보면 절대 도움 안 돼요. 매일 아침 하면 영어가 입에 올라요. 혀가 꼬부려지고 굴러가고 (웃음).”

탈북자 뿐 아니라 미국에 정착한 한인 이민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언어입니다. 유교적인 습성 때문에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고 혹시 틀린 표현은 아닐까 하는 우려와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 소극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데보라 씨는 그러나, 삶에 적극적으로 맞섰다고 합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계속 제자리를 맴돌 수 없었다는 데보라 씨. 그 결과 자신에게 가장 달라진 것이 바로 자신감이라고 말합니다.

“ 그 때보다 제일 변한 게 자신감. 그 때는 주눅들고 무섭고 나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 하는 것 못할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받은 교육도 틀리고 살아온 환경도 틀리고 하니까 여기 사람들 하는 것 따라 못할 줄 알았어요. 근데 3년 동안 하면서 그 사람들 하는 것 따라 하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데 저도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과 똑같이. 더 잘하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아 나도 할 수 있고 그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그런 데서 나오는 자신감이죠.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때는 못해요 하고 주눅 들었는데 지금은 어 할게요. 문제 없어요. 이렇게 나가는 거 있죠.”

그래서인지 주위의 다른 탈북자들이 쉽게 포기하거나 적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럽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몇몇 친구들은 아 어렵구나 하고 그냥 주저 앉더라고요. 해보려고 안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면 자신감이 생길 기회가 없죠. 근데 중요한 것은 힘들다고 해도 한번 해 보는 게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고. 못하는 것도 있지만 한번 해 보자 하면 나중에는 하게 될 수 있는 게 더 많더라고요.”

이런 동료들을 볼 때마다 북한과 미국의 삶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는 데보라 씨. 자유와 기회, 권리 등의 차이가 크다고 말합니다.

북한의 삶은 꼭두각시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단 말이에요. 여기서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말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이 것이 진짜 인간의 기본생활이구나 그런 게 느껴지죠.”

3년이 넘은 미국 생활. 요즘에는 퇴근 후나 주말에 친구들과 보내는 꿀맛 같은 시간들이 삶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여기는 거의 매 주말마다 놀고 회식하는 문화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그렇지 않고 1년에 많아야 7번이죠. 여기는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이잖아요. 그럼 파티 나이트를 하죠. 젊은이들이 가는 포장마차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내기도 하고 서로 벌도 받고 밤 가는 줄 모르고 놀죠.”

친한 친구들을 강제로 비난해야만 했던 생활총화 등으로 얼룩진 북한의 여가시간과는 비교 자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20대 후반의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는 미국생활. 데보라 씨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 있습니다. 많은 탈북자들이 그렇듯 자신을 통해 북한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때로는 부담스럽습니다.

“ 제가 어떨 때는 무척 힘들거든요. 주저 앉고 싶고 다 때려 치고 싶기도 하고. 근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 개인보다 북한을 보거든요. 이 사람들이 북한 사람을 모르니까. 쟤는 북한 앤데 되게 나약하네 주저 앉으면요. 또 뭐를 잘하면 어 북한 아이들도 되게 잘한다. 되게 그런 게 많아요. 개인을 보는 것은 40% 고 60%는 북한 전체로 보는 것 같아요. 전 그 것 때문에 어깨가 되게 무거워요. 내가 가서 나를 아는 사람들한테 행동 하나 잘못하면 나 개인에 국한되는 게 아니고 아 북한 사람들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이렇게 보이니까 행동하나 말 하나 되게 조심하게 돼요.”

이런 배경 때문에 많은 탈북 난민들은 출신을 숨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데보라 씨 역시 이력서를 제출할 때 출신국이 북한이란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북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취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아픔들은 특히 결혼 상대를 결정할 때도 영향을 미칩니다. 본인 보다 가족과 배경을 중시하는 한인들의 관습 때문에, 사귀던 한인 애인과 헤어진 여성들도 있고 아예 외국인과 결혼한 탈북 여성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보라 씨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북한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항상 제 마음에는 북한이 있죠. 뿌리가 북한이잖아요. 거기에 그리운 가족들과 친구들이 다 있으니까. 북한이 항상 잘 되길 바라고 주민들이 빨리 행복한 날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바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열심히 생활하면서 조금이라도 북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도움이 되고 싶어요. 북한에 살다가 여기 사는 게 아무나 사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선택된 것이고 복 받은 것이잖아요. 그만큼 북한 사람들을 위해 어깨가 무겁다고 생각해요.” BG MUSIC

"난 꿈이 있어요.."

꿈을 쫓아 험난한 과정을 이겨내며 도착한 아메리카. 3년이 훨씬 지났지만 데보라 씨의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때로는 외롭고 고향 생각에 잠 못 이룰 때도 있지만 먼저 체험한 자유와 도전의 기회를 꼭 성공으로 일궈 가겠다는 데보라 씨. 그녀의 꿈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북한이란 나라에서 태어나서 못한 거지 똑똑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구나.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하고 싶은 간호사를 하면서 여기 사람들보다 더 잘 못해도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아 북한 사람들 다른 사람이 아니구나. 우리처럼 똑똑한 사람이구나 그런 것 보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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