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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만에 성사된 클린턴 방북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지난 2000년 평양 방문을 계획했다가 당시 국내 정치적 상황 때문에 취소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9년 만에 평양 방문이 이뤄진 셈인데요, 미국의 전직 대통령으로는 지난 1994년 방북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최원기 기자와 함께 좀더 자세한 내용 살펴봅니다.

) 최기자, 클린턴 전 대통령이 특별기 편으로 오늘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지요. 미국의 전직 대통령으로 평양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인데요, 이후 15년 만에 이번에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다시 평양을 방문한 것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1차 핵 위기가 고조됐던 지난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시 나흘 간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카터-김일성 회담은 그 후 미-북 제네바합의와 남북정상회담 추진으로 이어졌습니다.

)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당시 현직 대통령이 바로 클린턴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평양에 갔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94년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한 배경을 좀 설명해 주시죠.

답) 네,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한 것은 쉽게 말해 미-북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당시 북한은 영변의 5MW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빼내서 마구 뒤섞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과거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했는지를 알기가 어렵게 됩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나섰다'고 판단하고 영변 핵 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했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을 방치할 경우 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문제 해결의 극적인 돌파구를 연 것입니다.

) 좀더 구체적으로 카터 전 대통령이 어떤 돌파구를 열었는지요?

답)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2가지에 합의했는데요. 우선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하고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감시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합의는 그 후 미-북 간 핵 협상으로 이어져 넉 달 뒤 미-북 제네바합의가 이뤄졌습니다. 당시 카터의 중재로 남북정상회담도 추진됐지만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정상회담은 무산됐습니다.

) 한마디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1차 북 핵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돌파구를 열었다는 얘기군요. 그런데 클린턴 대통령도 재임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었죠?

답)그렇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2000년 6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클린턴 대통령과의 미-북 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그 해 10월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의 2인자인 조명록 차수를 워싱턴에 보내 클린턴 대통령을 예방토록 했습니다. 당시 양국은 클린턴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을 추진하기로 했으나 이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명록 차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공동성명도 채택했죠?

답)그렇습니다. 당시 채택된 '미-북 코뮤니케'는 미국과 북한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4자회담을 여는 한편, 미-북 관계 개선을 위한 정상회담도 갖기로 했습니다.

)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간 것도 미-북 정상회담 준비차 간 것이죠?

답)그렇습니다. 조명록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한 열흘 뒤인 2000년 10월23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과 두 차례 만나 미-북 정상회담 문제와 함께 핵과 미사일 문제 등을 논의했었습니다.

)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더군요.

답) 네, 그때까지만 해도 워싱턴에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는데요. 김정일 위원장은 만나고 돌아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김 위원장이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훌륭한 대화 상대이며, 실용주의적이고 상당한 유머 감각이 있는 지도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후 미-북 정상회담은 어떻게 됐습니까?

답) 당시 북한은 빨리 평양에서 미-북 정상회담을 열자는 입장이었는데요. 클린턴 대통령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왜냐면 야당인 공화당이 미-북 정상회담에 부정적인데다가 이 때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결국 미-북 정상회담의 발목을 잡았군요?

답) 두 가지 요인입니다. 그 해 11월 7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는데 플로리다에서 선거 개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법정으로 가는 등 정치적 파문으로 이어져 미국 국내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졌습니다. 게다가 당시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큰 유혈 사태가 발생해,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12월21일 "평양에 가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과 북한 간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성사 일보 직전에 무산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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