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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기념일 특집 II] 미국 독립 정신의 표상지, 필라델피아를 가다


저희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에서는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국 독립의 의의와 역사 그리고 독립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독립기념일 특별 기획, ‘ 미국 독립의 발자취, 그 어제와 오늘’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미국 독립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보스턴에서 그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는데요? 오늘은 특별 기획 두번째 시간으로 미국 독립의 역사적 현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필라델피아로 청취자 여러분과 떠나보려고 합니다. 오늘 필라델피아 기행에 동행할 김정우 기자,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MC) 김정우 기자,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곳이죠?

(김) 그렇습니다. 사실 미국 독립 전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은 거의 대부분 이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났다고 봐도 과장이 아닙니다.

(MC) 1776년에 발표된 독립 선언서나 독립 전쟁이 끝난 후에 미합중국의 헌법이 만들어진 곳도 바로 이 필라델피아였죠?

(김)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잊기 쉬운 사실이있죠? 바로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합중국의 첫번째 수도가 바로 이 필라델피아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필라델피아는 미국 초창기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MC) 얘기를 듣다 보니까, 점점 이 필라델피이아란 도시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미국 독립의 생생한 현장이자, 미국을 지탱하는 토대인 독립 정신과 건국 이념이 새겨져 있는 도시, 필라델피아 얘기를 들어 볼까요?

(현장 1) 네, 여기는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이곳은 펜실베니아 주 북부에 위치한 펜스베리 매너입니다. 이곳은 지금 주말을 맞아서 관광객들로 붐비는데요, 이 펜스베리 매너는 펜실베니아 주와 필라델피아를 만든 윌리엄 펜의 저택이 있는 곳입니다.

(해설) 햇살이 부서지는 밴 스키버 호수와 광대한 대지에 깊숙히 뿌리박고 서있는 나무로 둘러싸인 이 대저택은, 그 고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이 곳을 만든 사람의 기품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 집의 원주인이자 퀘이커 교도로 미국의 건국 이념에도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윌리엄 펜은 어떤 사람인가? 펜스배리 매너에서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있는 존드라 모버그 씨는 윌리엄 펜은 바로 자유와 관용 정신의 화신이라고 설명한다.

“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윌리엄 펜은 훗날 토마스 제퍼슨이 표현했듯이, 미국 건국의 이념이 되는 원리들을 제공해준 사람입니다. 그가 내세웠던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그리고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는 정책은 훗날 고스란히 미국의 독립과 건국 이념으로 전승됩니다. 퀘이커 교도이자 평화주의자로 그리고 진보주의자였던 윌리엄 펜의 이런 사상들은 미국 독립 선언의 근본 토대가 됐을 뿐만이 아니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초석이 됐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겁니다.“

(해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신의 의지가 실현될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윌리엄 펜의 꿈은 완벽하게 실현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의 독립과 건국 정신에 끼친 흔적은 아름다운 스키버 호숫가에 자리잡은 그의 저택과 더불어 미국 역사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유산은 이제 우리가 찾아가볼 도시, 필라델피아 곳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해설) 필라델피아. 현재 주변 지역까지 합하면5백 8십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인구수로 따지면, 미국에서 5번째, 그리고 미국 동부에서는 두번째로 큰 도시다. 그리고 이 필라델피아 시는 현재 미국 안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해설) 필라델피아 시에 조성된 국립 역사 공원의 북쪽, 아치 거리와 3가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한 건물에서 18세기 퀘이커 복장을 한 안내원이 관광객들에게 건물의 역사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바로 초기 필라델피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퀘이커 교도들이 집회 장소로 사용했던 프리 퀘이커 미팅 하우스다. 이곳에서 만난 필라델피아 퀘이커 협회 제이 워랜 사무국장은 퀘이커 사상은 필라델피아 지역뿐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퀘이커 교도들은 대략 1681년부터 필라델피아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온 퀘이커 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유럽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을 끌어 들이는 기능을 해서, 이로 인해 필라델피아 시의 인구가 급속하게 불어나게 되죠. 퀘이커 교도들이 지녔던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원칙이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 교육 진흥 그리고 각종 구제사업에 보인 열의 등은 이후 독립 선언이나 미국의 헌법을 만드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현장2) 네, 필라델피아 시 초기 역사를 장식했던 퀘이커 교도들의 유적지를 나와서, 아치 길을 따라 한 구역만 서쪽으로 가면 미국의 독립과 건국 시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잠들어 있는 곳이 나옵니다. 바로 철학자이자 과학자 그리고 정치가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무덤이죠. 이 무덤은 그리스도 교회란 곳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설)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영면해 있는 무덤에서 마켓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면, 벤자민 프랭클린 기념관이 나타난다. 미국 역사에 그토록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의 기념관치고는 건물이 다소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건물 안에서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연기하는 배우가 관광 온 아이들을 앞에 놓고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해설) 기념관의 한쪽에서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1761년에 고안해 냈다는 악기, 글래스 아모니카가 연주되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한 과학자로서 그리고 독립 선언과 헌법 제정에 참여한 정치인으로서, 또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내는 악기를 만들어내는 장인의 모습까지 정말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념관에서 만난 브랜즈 학예연구관은 벤자민 프랭클린을 최초의 미국인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독립 선언 이전에는 자신들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이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미 당시에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프랭클린은 자신의 경험으로 영국 정부가 결코 식민지인들을 영국인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두번째 이유로는 당시 벤자민 프랭클린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아메리카 식민지 인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아메리카 식민지 바깥에서는 조지 워싱턴이나, 존 아담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 같은 인물들은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미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죠. 그런 의미에서 전 벤자민 프랭클린을 최초의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현장3) 네, 이 델라웨어 강을 끼고 들어서 있는 필라델피아 항구는 강가에 연한 항구로서는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립 전쟁이 벌어진 18세기에도 이 필라델피아 항은 많은 선박들이 드나드는 분주한 항구였는데요, 천혜의 항구와 입지 조건을 가졌고 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필라델피아는 독립 전쟁 당시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에 하나가 되죠. 그런데 당시 필라델피아의 번영을 상징하는 장소가 바로 이 필라델피아 항구 근처에 있습니다.

(해설) 필라델피아 항구를 나와 이 체스트 넛 길을 따라 두 구역쯤 서쪽으로 가면 볼 수 있는 건물이 바로 CITY TAVERN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오래 된 삼층짜리 건물인 CITY TAVERN은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18세기 독립전쟁의 여명기에 필라델피아 저명 인사들이 모이는 고급 사교장이었다고 한다. CITY TAVERN의 주인인 월트 스타이브 씨는 당시 이곳에서 많은 비밀 회의와 토론이 이뤄졌다고 강조한다

“ 이곳 CITY TAVERN은 1773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는 필라델피아의 번영을 뒷받침하던 각종 상거래가 이뤄졌지요. 한마디로 필라델피아 경제가 바로 이곳에서 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또 CITY TAVERN은 지역 명사들의 사교 장소로 이용됐습니다. 조지 워싱턴, 존 애담스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곳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많은 얘기와 토론을 했던 장소기도 합니다. 조지 워싱턴과 존 애담스가 처음 만났던 장소도 이 CITY TAVERN으로 알려져 있죠.”

(해설) 한창 뻗어나가는 젊은 식민지, 아메리카의 번영을 상징하던 필라델피아, 그리고 이 필라델피아를 움직이던 사람들이 매일 이 CITY TAVERN에 모여, 식민지 아메리카의 미래를 토론하면서 밤을 지새우던 사이, 미국 독립의 여명은 서서히 밝아온다.

(해설) 보스턴 티 파티 사건 이후에도 식민지 미국에 대한 영국의 과중한 세금 부과와 불공평한 대우는 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조치로 야기된 불만은 미국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런데 마침내 1774년 9월, 13개 식민지 주 중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주 대표들이 본국 영국의 조치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1차 대륙회의를 개최한다. 그런데 이들 식민지 대표들은 많은 도시들 중에서 왜 하필 필라델피아를 첫번째 대륙회의 개최지로 정했을까? 필라델피아 카펜터스 협회의 제임스 시카리스 사무국장은 당시 필라델피아가 식민지 미국에서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지리적 중심지였기 때문에 필라델피아가 선택됐다고 지적한다.

“ 필라델피아는 1774년 무렵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고 또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인구면으로나 경제적인 측면으로나 당시 식민지 미국의 실질적 수도는 필라델피아 였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지리적으로도 필라델피아는 북쪽의 뉴 햄프셔주와 남쪽의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에요.”

(현장4) 네, 독립 전쟁을 전후해 명사들의 사교장이자 또 상업의 중심 장소였던 CITY TAVERN을 나와 풋 브릿지 길과 4가가 만나는 길목에 오게 되면 바로 CARPENTERS’ HALL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곳 카펜터스 홀에서 미국 독립으로 가는 초석이 놓인 1차 대륙회의가 열리게 되죠? 이 건물은 주변 건물들에 비하면 다소 초라해 보이긴 하는데요, 역사적인 중요성에 있어서 만큼은 어느 건물에도 뒤지지 않는 그런 건물입니다.

(해설) 카펜터스 홀은 전문 장인들의 모임인 카펜터스 길드가 1773년에 세운 건물이다. 그런데 어떤 사연으로 1774년 1차 대륙 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게 됐을까? 카펜터스 협회 제임스 시카리스 사무국장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 당시 식민지 대표들을 수용할 수 있고 또 빌려주는 것이 가능했던 장소가 딱 두군데가 있었습니다. 한 곳은 지금은 인디펜던스 홀이라고 불리는 당시 식민지 정부 건물이었고요, 다른 한곳이 바로 이 카펜터스 홀이었죠. 펜실베니아 주 대표로 영국을 지지하던 제임스 갤로웨이 같은 왕당파들은 처음에는 사무엘 애담스 같은 급진파들의 기를 죽이려고 주 정부 건물을 회의 장소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립적인 장소를 원했던 다른 식민지 대표들의 반대로 이 카펜터스 홀이 회의장소로 선택됩니다.”

(랜돌프) 안녕하십니까, 전 대륙 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페이턴 랜돌프입니다. 필라델피아에 오시느라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J.아담스) 전 매사추세츠에서 온 존 아담스입니다.

(S.아담스) 같은 곳에서 온 사무엘 아담스요.

(워싱턴) 안녕하십니까, 조지 워싱턴입니다.

(랜돌프) 이렇게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본국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게 돼 정말 다행입니다.

(J.애담스) 그런데 도대체 영국이 우리 식민지의 무역을 좌지우지할 권한이 있습니까? 아무리 모국이라고 해도 영국이 그럴 권한이 없다고 봅니다!

(랜돌프) 그렇습니다. 만일 영국이 법으로 우리를 규제하고 싶다면 우리도 그 법을 만드는데 꼭 참여해야 합니다. 투표권도 주지 않으면서, 세금만 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워싱턴)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뭉쳐서 영국과 협상을 한다면 영국도 우리를 지금처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S.아담스) 잠깐만, 저기 패트릭 헨리라는 사람이 지금 연설을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헨리:) 의장님, 사태를 완화시키려는 것은 이제 헛된 일입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를 거듭 외치고 있지만,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실제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에 북쪽에서 불어올 강풍은 우리의 귀에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려줄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이미 전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가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쇠사슬을 차고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리도 달콤하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신이시여, 길을 인도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해설) 식민지 군대는 무력 진압에 나선 영국군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차례로 전투를 벌인다. 이후 식민지 군이 뉴욕주의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한 즈음, 또다른 식민지 대표회의를 열자는 제안이 나온다. 드디어 식민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는 제2차 대륙회의로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현장5) 네, 1차 대륙회의가 열렸던 카펜터스 홀을 나와서, 체스트넛 길을 따라, 5가까지 오게 되면 바로 이곳, 인디펜던스 홀이 나옵니다. 아, 주말인 이곳엔 이 인디펜던스홀을 구경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미리 예약을 해야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얘기는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몰린다는 뜻인데요, 그 이유는 바로 이곳, 인디펜던스 홀에서 에서 2차 대륙 회의가 열렸고요, 또 이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기 때문입니다.

(대표1) 독립 선언을 합시다!

(대표2) 아니오! 독립은 불가하오!

(의장1) 어허! 좀 조용히 하시오, 조용히!

(대표1) 여러분, 우리가 이 상황에서 독립 선언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독립을 선포해야 할 땝니다.

(대표2) 어허, 이런 큰일 날 소리를! 영국군과 붙어서 우리가 당해낼 수 있겠소! 그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우리들 사형집행장에 서명하는 것하고 다름없는 거요!

(대표3) 영국왕은 우리들을 이미 배신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제 전쟁은 시작됐습니다. 독립 외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대표1) 그렇습니다. 토마스 페인 씨가 지난 1월에 주장했듯이 우리는 독립을 해서 민주공화정을 이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페인 씨가 말하는 역사의 상식입니다.

(대표3) 여러분, 우리 모두 목숨을 걸고 나서서 독립을 쟁취해 냅시다. 지금 우리는 우리들의 사형집행장에 서명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행동은. 오직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요.

(해설) 1776년 7월 4일, 식민지 아메리카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를 찾기 위한 대장정에 나선다.

(남) 인류의 역사에서 한 민족이 다른 한 민족과의 정치적 결합을 해체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자연법과 자연의 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 평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정한 고려는 우리로 하여금 독립을 요청하는 여러 원인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남)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그리하여 통치체제의 정당한 권력은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 이에 아메리카 연합 각 주 대표들은 전체 회의에 모여, 우리의 공정한 의도를 세계의 최고 심판에 호소하는 바이며, 이 식민지의 선량한 인민의 이름과 권능으로써 엄숙히 발표하고 선언하는 바이다.

(남) 이 연합한 모든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당연히 그러한 국가가 되어야한다.

(남. 여) 우리들은 이에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신성한 명예를 걸고 신의 가호를 굳게 믿으면서 이 선언을 지지할 것을 서로 굳게 맹세하는 바이다.

(해설) 역사 유적지를 구경하러 왔거나 아니면 미국 독립과 건국 정신의 흔적이 도처에 남겨져 있는 필라델피아의 광경에, 경이로움을 품고 있을 사람들로 붐비는 인디펜던스 홀 앞에는 이 인디펜던스 홀만큼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는 장소가 있다 바로 자유의 종이다. 이 자유의 종은 인디펜던스 홀과 함께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상징물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종이 자유의 종이란 호칭을 얻게 됐을까? 필라델피아 국립 역사공원의 학예연구관인 미란다 오르소 씨의 말을 들어보자.

“ 이 종은 원래 펜실배니아 주정부 건물, 즉 지금의 인디펜던스 홀에 걸렸던 종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자유의 종이라고 불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종이 독립선언서가 작성되고 발표된 인디펜던스 홀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또 또 다른 이유로는 존 애담스가 당시 일기에 쓰기를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고 나흘후인 7월8일에 독립선언서가 나온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종을 울렸다고 해서 이 종이 미국의 독립선언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지요.”

(해설) 자유의 종이 걸려있는 건물을 나와 북쪽으로 두 구역을 건너가면 미국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진 곳으로 알려진 장소가 나온다. 바로 베씨 로스 하우스다. 그렇다면 미국 최초의 국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베씨 하우스의 역사학자인 수잔 두덴즈 씨로부터 이곳에서 국기가 만들어진 얘기를 들어보자.

“ 베씨 로스는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평범한 퀘이커 교도였어요. 그런데 1777년 어느 날 조지 워싱턴 장군이 품속에서 흰색과 빨간 색 줄 13개와 13개의 별이 그려진 국기를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면서 로스 여사에게 이것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로스 여사는 만들 수 있다고 대답했고요, 그래서 미국 최초의 국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진거죠.”

(현장6) 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은 이후 조지 워싱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영국과 힘겨운 전쟁을 이어 나갑니다. 이곳은 필라델피아 남부, 야트막한 구릉지에 위치한 브랜디와인 전장터입니다. 8개월 전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랜턴에서 영웅적인 승리를 거둔 위싱턴 장군은 수도인 필라델피아를 지키기 위해서 이곳 브랜디와인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요 남쪽에서 북상하던 영국군을 맞이한 곳입니다.

(해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여명에 브랜디와인으로 이동한 영군군은 오후 두시경 혁명군과 조우해 전투를 시작한다. 반나절 동안 계속된 전투끝에 혁명군은 패하게 되고 결국, 필라델피아를 영국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패하고 이후 저먼 타운 전투마저도 패한 혁명군은, 1777년 12월 19일, 필라델피아 남부 슈일킬 강 유역에 위치한 밸리 포즈에서 장기 농성에 들어간다.

(해설) 밸리 포즈는 필라델피아에서 남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영국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아니지만 워싱턴 장군이 이끌던 혁명군이 겨울을 나고 또 군을 재정비할 목적으로 1777년 12월부터 1778년 봄까지 주둔하던 곳이다. 취재진이 찾았을 때 한창 비가 내리고 있던 밸리 포즈에서는 독립전쟁 당시에 사용하던 대포를 실제로 발사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해설) 밸리 포즈에서 혁명군은 전투를 벌여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이 밸리 포즈 시기는 미국 독립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밸리 포즈 국립공원의 바바라 폴러린 부소장의 말이다.

“ 이곳 밸리 포즈에 혁명군이 주둔하는 시기는 독립 전쟁기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간입니다. 밸리 포즈에 주둔하던 혁명군이 1만 2천명인데 주둔 기간 중에 굶주림과 추위로 2천명이 죽었습니다. 혁명군에게 겨울을 나기 위한 두꺼운 옷이나 식량 같은 보급품이 지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겨울을 난 결과였죠.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은 살아남아서 조직을 재정비합니다. 특히 이 시기 유럽의 프러시아에서 건너온 바론 스토이벤이란 전직 장교가 훈련을 맡게 되는데요, 이를 계기로 혁명군은 영국군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기르게 됩니다. 또 이 기간 중 프랑스가 미국을 돕기로 결정해 이리저리 미국 측으로는 좋은 소식들이 많았던 시기가 바로 이 밸리 포즈 주둔 시기입니다.”

(해설) 밸리 포즈 주둔 이후 혁명군은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면서 영국군과 맞서게 된다. 초기 전투의 패배에도 굴복하지 않고,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밑거름으로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 영국군과 맞서던 혁명군은 마침내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콘월리스 장군이 이끌던 영국군을 격파하고, 독립 전쟁의 기나긴 여정을 마치게 된다.

(현장7) 네, 이곳은 다시 필라델피아 국립 역사공원 안에 있는 인디펜던스 홀 앞입니다. 미국은 요크타운 전투 이후에 1776년 독립을 선언한지 7년만인 1783년에 영국과 파리 조약을 맺고 정식 주권국가로 출발하게 되죠? 그리고 1787년 바로 이곳 인디펜던스 홀에서 미국 헌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미국 헌법을 만든 것을 기념하는 콘스티튜션 센터는 제가 서있는이곳에서 북쪽으로 두 구역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설) 헌법이 제정되고 승인된 이후 1800년까지 필라델피아는 새로 탄생한 나라인 미국의 첫번째 수도가 된다. 젊은 나라 미국은 필라델피아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고, 점점 자라면서 자신들만의 힘의 원천을 키워내, 드디어 20세기에 들어서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자유를 갈구하며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신생국 미국, 이 젊은 나라 미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최강대국에 오르게 된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게 될까? 다음 시간에 그 해답을 찾아보자.

(MC) 네, 여러분께서는 독립 기념일 특별 기획, 미국 독립의 발자취, 그 어제와 오늘, 제2부 필라델피아편을 들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필라델피아를 만든 윌리엄 펜과 퀘이커의 발자취로부터 시작해서 제1, 2차 대륙회의 가 열렸던 장소 그리고 영국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까지, 미국 독립의 숨결이 맺혀 있는 곳들을 모두 둘러 봤는데요, 자, 김정우 기자,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서 필라델피아 구석구석을 다녀봤는데, 느낌이 어땠습니까?

(김) 네, 필라델피아는 한국의 경주같이 도시 전체가 역사 유적지였는데요, 하지만 이런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화석화해서, 관광객들 지갑이나 열게 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고요,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역사성과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현대성이 절묘하게 결합된 그런 도시였습니다.

(MC) 김정우 기자가 프로그램 중간에 언급한대로, 필라델피아는 많은 미국 사람들이 찾고 있는 도시인데, 필라델피아의 어떤 점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걸까요?

(김) 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독립과 건국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는 도시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뿌리에 대한 귀소본능 같은 것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이런 귀소본능을 나라나 민족 차원으로 확대해 본다면 미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필라델피아로 향하게 하는 원인인 것 같습니다.

‘미국 독립 기념일 특별 기획, 미국 독립의 발자취를 찾아서 제2부 미국 독립의 표상지 필라델피아를 가다’ 편, 이제 마쳐야 할 시간이 됐네요. 다음 이 시간은 특별기획 마지막 순서로써 미국, 그 힘의 원천을 찾아서 편이 방송 됩니다. 많이 기대해 주시고요,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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