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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5월 17일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흑백 분리 교육에 대한 그 동안의 합헌 입장을 뒤집고, 만장일치로, 캔사스 주 교육위원회가 7살 난 흑인 소녀에게 집에서 가까운 백인학교가 아니라 1마일 떨어진 흑인학교를 다니게 한 결정을 위헌으로 판결합니다.

남부의 많은 주가 흑인의 투표권과 배심원 자격 등을 부인하고, 버스에서도 흑인들은 뒷좌석에 앉아야만 했던 당시로서 이 판결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삼 년 전, 캔자스 주에 살고 있던 여덟 살짜리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은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를 놔두고 왜 기찻길을 건너 한참을 걸어야 하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은 딸을 가까운 초등학교로 전학시키려 했지만 교장은 입학을 거절합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에 브라운은 소송으로 맞서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소송으로, 이 소송은 3년간 계속됐고 1954년 오늘, 마침내 미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립니다.

흔히 '브라운 판결'이라 불리는 이 역사적 결정을 통해 얼 워런 대법원장은 그때까지 백인 흑인 학교를 따로 운영하던 남부의 주 정부들에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인종별 학교를 통합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남부 주들은 완강했고 판결 이후 3년 동안 남부지역 백인학교 3000여 개 중에서 인종 분리를 폐지한 학교는 600여 개에 불과했습니다.

버지니아 대학의 딕 하워드 법학 교수는 그러나, 브라운 판결이 인종의 벽을 허무는 민권운동의 불을 지른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후 1964년 마침내 흑인에게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한 민권 법이 제정되기에 이릅니다.

1969년,

한국에서 위장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수근 씨의 사형이 확정됩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었던 이수근은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습니다. 그는 이날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유엔군 대표의 차에 뛰어 올랐고, 북한 경비병이 총격을 가했으나 탈출에는 15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귀순 후 이수근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거액의 정착금이 주어집니다. 대학교수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았고 중앙정보부 판단 관으로 채용되어 반공 사업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사색의 자유를 찾아 북을 탈출했다는 이수근. 그는 69년 1월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콧수염에 가발을 쓴 채, 김포공항을 빠져 나가 홍콩으로 갑니다.

하지만 얼마 못돼 베트남에서 중앙 정보부 직원들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고, 한국 당국은 이수근의 귀순이 위장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사형 직전 남긴 유언에서도 이중간첩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이수근은 1969년 오늘 사형이 확정된 지 47일 만인 같은 해 7월 3일 교수형에 처해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 이후, 이수근의 이른바 이중간첩 행위가 남한 정보당국에 의해 날조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지속됐습니다.

이후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 동안 인식되어온 '위장간첩 이수근'이라는 도식이 마침내 깨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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