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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4월 20일


1889년 4월 20일, 오늘,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서 3류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독일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고, 관료와 군인, 대지주, 지식인 대부분도 독일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체코슬로바키아인과 폴란드인, 남슬라브인들이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는 위기감이 고조됐습니다.

특히 20세기 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 반유대주의자가 돼갑니다.

1919년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나치스라는 반유대주의적 작은 정당에 가입했고, 웅변에 능했던 그는 그 웅변의 힘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해 당세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후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전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히틀러는 일당 독재체제를 확립한 후 대통령이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한 수상, 즉 총통으로 명실상부 독일의 독재자가 됩니다.

1933년 수상 취임 후 시작된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돼 홀로코스트, 대학살로 숨진 유대인의 수는 600만명이 넘습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거장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던 히틀러가 나치의 집회에서 당가처럼 사용한 바그너의 '지그프리드의 목가'는 종전 후 이스라엘에서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법원은 바그너의 음악이 홀로 코스트 생존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는 금기의 대상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 일본과 동맹을 맺고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서유럽을 차지하지만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에서의 참패 등으로 패색이 짙자, 결국 1945년 방공호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997년 4월 20일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씨가 한국에 입국합니다. 황장엽씨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3번이나 지낸 북한 핵심 권력자였습니다.

황장엽씨는 김정일에게 의견을 제시 했을 때 김정일이 지지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에는 자신의 맘대로 결정하는 일이 다 반수였다고 말합니다.

황장엽씨는 결국 두 달 전 북한 체제의 모순과 부조리에 회의를 느껴 망명했고, 이것은 주체 사상의 몰락으로 간주돼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북한을 민주화시키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갖고 한국행을 결심했다는 그의 망명은 하지만 한국 정부의 대북한 포용정책과 맞물려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황장엽씨는 "전면 붕괴에 직면했던 김정일 체제가 햇볕정책 때문에 되살아났다"며 햇볕정책을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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