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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4월 19일


1960년,

한국 서울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4.19혁명의 불길이 높이 타오릅니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부정 부패한 정부에 분노한 대학생들의 시위대열에 중학생과 고등학생, 일반 시민들도 합류했고, 시위대는 순식간에 십만명을 넘어서며 거대한 봇물을 이룹니다.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로 몰려갔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합니다. 이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5시부터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 진압을 감행했습니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우는 4.19일 이날 하룻동안 전국에서 약 200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이 부상합니다.

계엄군의 진주로 잠시 잠잠했던 시위물결은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거세졌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합니다. 같은 해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 29일 실시된 선거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출범합니다.

4.19 혁명은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의 승리로,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만든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2004년,

2004년 4월 19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의 첫 정상회담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합니다.

중국의 제 4세대 지도부 출범이후 처음 방중한 김위원장과 후 주석 두 사람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북핵 6자회담과 북한핵 문제를 주요의제로 논의합니다. 또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난과 2년전, 중국의 신의주 특구 장관 구속으로 껄끄러워진 양국 간의 관계 개선 방안등 주요 현안들이 모두 다뤄진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두사람의 정상회담 후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북핵 문제에 돌파구가 마련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 핵 6자 회담은 해를 넘겨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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