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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3월 16일


1751년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제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 미국 버지니아주의 콘웨이 항에서 태어났습니다.

버지니아주의 한 농장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메디슨은 1769년 후에 프린스턴 대학이 되는 college of NewJersy 에 입학해 법을 공부했습니다.

2년 만에 공부를 끝낸 메디슨은 1784년부터 2년 동안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과, 1787년 대륙회의 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이후 메디슨은 알렉산더 해밀턴과 존 제이 등을 도와 미국 헌법의 초안의 기초를 맡아, 후에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메디슨은 미국 초기 국회를 이끌며 권리 장전의 기초를 다져 '권리 장전의 아버지'로 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 후 1801년부터 8년 동안, 메디슨은 미국의 제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 정부의 국무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임기 중 메디슨은 루이지애나의 구입을 감독해 미국의 영토를 2배 이상 늘렸고 성공적이지 못했던 1807년의 무역금지법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08년 메디슨은 미국의 제 4대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메디슨은 임기 초에는 제퍼슨의 중립 정책을 계승했지만 이후 1812년 미국의 경제권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임기 후 매디슨은 토마스 제퍼슨을 도와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를 세우는 등 미국 교육의 향상에 힘 썼습니다.

메디슨 대통령은 미국의 헌법 초안에 주도적인 역할 했고 또한 미국 연방헌법의 삼권분립제도를 기초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2005년

1948년 끊겼던 남북한의 전기가 57년 만에 다시 이어졌습니다. 한국이 북한의 개성 공단에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은 휴전선에 인접한 문산 변전소에서 1만 5000 킬로 와트의 전력을 개성공단에 있는 한국 기업들에 공급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1948년 일방적으로 남한에 전기를 보내는 것을 중단해 남한은 심각한 전력난을 겪었습니다. 당시 발전 설비의 약 90% 이상이 북한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남한보다 8배나 많은 발전용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남한은 1961년 한국 전력 주식회사를 건립해, 발전소 건설에 힘썼고, 3년이 지난 후, 역사적인 '무제한 송전'을 실시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해방 후 겪었던 전력난이 해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남한의 전력 사정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1990년대부터는 세계로 나아가, 필리핀, 중국, 레바논, 미얀마, 리비아, 캄보디아, 우크라이나 등에 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오늘, 57년 만에 다시 남한과 북한의 전력 망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03년 기준으로 북한의 발전 용량은 770여 만 킬로와트로, 5600만 킬로와트가 넘는 남한에 비하면 7분의 1 수준입니다.

전문가들은 지난 70년대 중반 남한은 지속적인 설비 투자로 발전 용량을 대폭 늘렸지만, 북한은 군수산업에 주력하면서 발전 시설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남북의 전력 사정이 바뀌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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