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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간첩 사건] 통일 이후 간첩,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탈북 간첩, 원정화 사건의 파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동독 출신 학자들로부터 한국의 탈북 간첩 사건에 대한 견해와 동독의 경험을 세 차례에 걸쳐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순서로 독일 통일 이후 간첩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한반도 통일 이후 간첩 사건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봅니다.

진행자: 서지현 기자(). 지금까지 차례에 걸쳐 동독의 사례 등을 알아봤는데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간첩들은 어떻게 처리됐습니까.

답: 동독 난민 출신 간첩은 물론 동독으로부터 고용된 서독 국적의 간첩이 많았다고 전해드렸었는데요. 서독 내 2만여 명의 간첩 중 1990년 통일 이후 처벌을 받은 이들은 2백50 명에 불과했구요, 처벌도 대부분 몇 년의 징역형에 그쳤습니다. 통일 이전에 잡힌 간첩들은 대부분 동서독 간의 수감자 교환 등으로 풀려났구요.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루디거 프랭크 교수는 통일 이후 동독 국적의 간첩들은 동독법에 따라서는 합법적인 행위를 한 것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힘든 경우가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프랭크 교수는 독일은 통일 뒤 동독 간첩에 대한 처벌에서 동독의 법을 따랐다며, 한국도 통일 이후 북한 국적의 간첩이 북한의 법률을 어기지 않았을 경우 처벌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간첩죄의 형량을 따지기 이전에 간첩 행위가 죄냐, 아니냐를 따지기가 힘들었다는 것이군요.

답: 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동독의 비밀 정보기구 '슈타지'의 대외정보부 수장으로, 20세기 최고의 스파이로 불리는 마르쿠스 볼프 역시 이같은 이유로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습니다. 볼프는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의 비서관이었던 동독 간첩 귄테 기욤을 무려 25년 간 공을 들여 잠입시킨 인물입니다. 통일 독일은 볼프에게 '반역죄'를 적용, 6년형을 선고했는데요. 볼프는 자신은 동독 국민으로서 동독 법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며, 법률을 위반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라를 배반했다는 것이냐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1995년 독일 대법원은 볼프에 대해 집행유예, 사실상의 사면을 선고했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간첩'(A Spy without a Country)에게 어떤 법률을, 어떤 범위에서 적용해야 할지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도 생각해봐야 할 측면입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서독 국적 간첩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답: 서독 국적의 간첩들에 대해서도 법 적용에서 크게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불법 사실이 밝혀져도 대개 공소시효가 있어서 처벌이 쉽지 않고, 또 증거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디터 데케 조지타운대 교수는 독일은 지금도 여전히 서독 국적 동독 간첩에 대한 재판을 여럿 진행 중인데 자신의 지인 가운데 상당수도 유죄를 선고받아 아직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며, 하지만 대부분 증거 확보가 어려워 가벼운 형을 선고 받은 경우가 많다고 전했습니다.

진행자: 독일의 경우 이처럼 간첩 행위 처벌을 비롯해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법령 정비로 진통을 겪었는데, 한국 역시 통일 이후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독일의 사례를 보면 간첩 활동에 대한 실제 법적 처벌 정도와 간첩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정서와는 간극이 커질 수도 있겠네요.

답: 네, 간첩에 대한 한국과 서독 간 일반 여론의 반응을 비교해 보면 통일이 되기까지 한국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프랭크 교수는 독일 통일 이후 서독 내 동독 간첩들이 적발되자 서독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실망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서독 내 동독 간첩의 숫자가 예상보다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서독이 동독보다 경제, 사회, 정치, 모든 면에서 앞서 있는데 이처럼 많은 수의 동독 간첩이 서독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프랭크 교수는 서독 국민들의 당시 감정은 분노나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그 같은 간첩을 있게 한 서독 정권에 대해, 또 서독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고 있던 서독 국적 동독 간첩들에 대한 실망감이 훨씬 더 컸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지금 한국의 분위기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이 훨씬 많은 같군요.

답: 네, 프랭크 교수는 원정화 사건에 대한 한국 여론의 반응은 한국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 얼마나 뿌리 깊은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잘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랭크 교수는 한국 언론을 보면 간첩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두려움을 많이 느낀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이는 간첩 사건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반응과 매우 다른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며, 과거의 경험은 미래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줍니다. 프랭크 교수는 앞으로 통일 후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과 북한의 모든 문서가 공개됐을 때 드러날 '과거'에 대해 한국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또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우려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한국과 독일의 통일 상황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 않습니까.

답: 물론 독일은 한국전쟁과 남북 간 겪었던 동족상잔의 비극,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간첩 사건에 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동서독 정권이 대립하고, 동독 난민에 대한 국경 지방 총살 등이 여론의 분개를 일으키는 등 인권 문제가 제기된 점은 비슷하지만 남북한 간의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의 역사는 독일에서는 없었습니다.

프랭크 교수는 한국과 북한이 과거 동독과 서독처럼 서로가 이웃에 사는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며,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평화롭게 느끼게 되면 한국이 북한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이 사라지게 되겠지만 이는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분단된 상황에서는 '간첩 행위가 죄냐'는 근본적인 질문조차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뤄질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시점에 법률적인 경계를 따지기에 앞서 '간첩'이란 단어에 대한 뿌리 깊은 한국 국민들의 상처가 언제쯤이면 치유될지 생각해 볼 시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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