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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미군 젠킨스 씨, ‘외부세상은 북한의 실상 몰라’


43년 전 주한미군으로 복무 중 탈영해 북한으로 넘어갔던 찰스 젠킨스 씨가 북한을 빠져나오기까지 40년 간 북한에서의 삶을 이야기 한 회고록 ‘마지못한 공산주의자 (The Reluctant Communist)’가 최근 미국에서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인 납북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자신의 아내를 따라 3년 전 일본에 정착한 젠킨스 씨는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바깥 세상은 북한의 참혹한 삶의 실상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미정 기자가 `마지못한 공산주의자' 젠킨스 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오늘과 내일 두 차례로 나눠 전해드립니다.

43년 전인 1965년 1월 5일 새벽, 그 추웠던 혹한의 새벽을 그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남북한을 가로막은 비무장지대 앞에 멈춰 선 24살의 미국 육군 중사 찰스 R. 젠킨스. 젠킨스 중사는 베트남전에 파견된다는 공포감에 떠밀려 돌이킬 수 없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범합니다. 베트남전 파병을 피해 북한을 통해 소련으로 건너간 다음, 미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그는 입고 있던 윗 옷으로 갖고 있던 총부리를 막고, 탄알을 빼내 주머니에 넣은 뒤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으로 탈영합니다.

일시적 피난처로 기대했던 북한. 그러나 북한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커다란 감옥’과 같은 곳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바로 지옥이었다고 젠킨스 씨는 말했습니다. 젠킨스 씨는 그 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넘자마자 평양으로 압송된 젠킨스 중사는 혹독한 심문 과정을 거쳐 자신과 마찬가지로 월북한 미군 병사 3명과 함께 수용됐습니다. 젠킨스 씨는 먹을 것 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허름한 집에서 북한 병사들의 감시 아래 하루종일 주체사상 학습을 강요받았습니다.

김일성 교시를 하루종일 암기해야 했던 그는 지금도 한국말로 교시를 외우는 꿈을 꿉니다. 당시 한 마디라도 틀리면 되돌아오는 것은 사상해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구타와 핍박, 그리고 자기반성의 시간이었다고 젠킨슨 씨는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자발적으로 비무장지대를 넘은 이들 4 명의 미군 탈영병들에게 전쟁포로와 같은 잔혹한 대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북한 당국에게는 어떤 면에서 냉전시대의 자랑스런 전리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이들에게 미래의 북한군 장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때로는 대미 선전영화에 출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젠킨스 씨는 1968년 북한군에 나포된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 호 사건을 다룬 선전영화에 미군 선장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젠킨스 씨는 저서에서 자신들은 `대체로 식량을 배급받았고, 눈과 비를 피할 집도 있었으니 저 일그러진 국가에서 그나마 극소수의 행복한 집단에 속했다'며, 그렇지만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당시 자신의 생활수준은 "바닥 중의 바닥이었다"고 회고해, 일반 북한주민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젠킨스 씨는 서방세계는 북한의 처참한 실상의 정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젠킨스 씨는 1950년대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나았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자 북한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부족으로 굶어죽었고, 암시장에는 한 때 아이들이 팔려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또 생존을 위해 돼지고기와 쥐고기를 섞어 순대를 만드는 사람들과 겨울철 추수가 끝난 논에서 벼의 뿌리를 뽑아 절구에 넣어 찧어 먹는 사람들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북한 인민군들의 잔혹한 횡포였다고 젠킨스 씨는 회고했습니다. 충분한 배급을 받지 못하는 인민군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집집마다 주민들의 식량을 착취해 가기 일쑤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민군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주민을 긴 막대로 넘어뜨린 뒤 자전거를 포함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은 일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젠킨스 씨는 이후 생존을 위해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탈출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양주재 러시아 대사관과 중국대사관을 통한 망명 기도가 실패로 이어지자 그는 비로소 북한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는 거대한 감옥임을 깨닫게 됩니다.

북한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15년을 보낸 젠킨스 씨에게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바로 일본인 납북자 소가 히토미와의 결혼이었습니다.

북한이란 거대한 감옥 속의 두 사람의 외로운 이방인. 나이 40살에 이뤄진 21살 꽃다운 히토미와의 결혼이 25년 후 북한에서의 탈출로 이어질 것으로는 당시 젠킨스 씨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지못한 공산주의자(The Reluctant Communist)-찰스 로버트 젠킨스’ 내일 이 시간에는 젠킨스 씨와의 인터뷰 두 번째 편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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