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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 - 3회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특집기획으로 한반도 분단의 또다른 희생자인 일본인 탈북자들의 얘기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오늘은 그 세번째 순서로 북한에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일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정을 전해드립니다. 이들은 40여년 전과 너무도 달라진 일본사회에 적응하는 데 있어 언어 문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 탈북한 자식들 역시 어머니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서지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지난 2003년 탈북해 94살의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우에다 즈타에 씨는 '반가움'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43년 간의 타향살이는, 그렇게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뜨거움마저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42년 떨어져 살았으니 진짜 내 어머닌가 생각되고, 반갑다, 속으로 정말 반갑구나 하는 생각은... 살아계시구나 생각 뿐이지, 정말 반갑다는 생각은 깊이 없었어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20년을 살고, 북한에서 40년을 살다 예순 살에 일본으로 돌아온 사이토 히로코 씨. 히로코 씨는 일본 땅을 다시 밟은 그 순간에야 자신이 일본에서보다 북한에서 곱절을 더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뭐이랄까 깜짝 놀랐죠. 나 있을 때보다 너무 달라지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라지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40여 년만의 고국은 그야말로 별천지였습니다.

우에타 즈타에: “일본에 가면 그게 다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도 없었어요. 다 달라지고, 거기 집이 있었는데 그게 어디인지도 모르고, 다 새로 집을 지으니까... 못 찾겠어요. 100% 달라졌는데 하나도 모르겠는데.”

지리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누군지, 도로체계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외국어 표기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머릿 속이 그저 하얗기만 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사이토 히로코: “테레비도 중앙보도 밖에 못보잖아요. 뉴스라는 거 하나도 모르죠. 일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왔거든. 다른 거 뉴스라는 건 모릅니다. 딱 조선 안에서 좋은 소리만 듣고...”

우에다 즈타에 씨는 요즘도 일본어보다 조선말이 먼저 나와 곤란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팍 조선말이 나올 때가 있어요. 어쨌든 팍팍팍 나온다고. 수퍼 맥주 사러 갔는데 일본말로 해야 하는데 병 맥주 오데 있나, 세 번 말을 했다고요... 아, 내가 이제 조선 말을 했구나, 부끄러워 돌아서 나오기도 하고요...”

일본 말을 쓰지 않은 지 40년. 일본어를 손으로 쓰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함께 탈북한 자식들의 어려움은 더 했습니다. 처음 와보는 낯선 어머니의 나라에 정착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자식들이) 말을 못하니까... 이제는 일해요... 식당에서...

우에다 즈타에: 자식들이 일본말이라곤 하나도 모르잖아요. 딸이 와서 조선에서 보지 못하는 것 보니까 수퍼라도 데리고 가면 너무 놀라서, '어머니 이거 뭐이가,' '이거 뭐이가'... 놀라서, 너무도.

이럴 줄 알았다면, 일본말이라도 좀 가르쳐 줄 걸,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손님들이 오면요, 일본말 배워줄 걸 그랬구나 생각이 났는데, 자식한테 못배워주고, 지금 열두 살 되는 손자는 일본말을 북한에서 배워줬는데 내가 배워준 것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알고 있어요."

북한에서 낳아 함께 탈북한 자식들은 일본 국적이 없습니다. '외국인 등록증' 역시 일본에 5년 이상 거주해야 발급되기 때문에 그 전에는 무국적자로 취업 등에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 나라' 일본이 자식들에게는 아직 '남의 나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도 말이나 지리, 이런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되는 문제들입니다. 다시, 익숙해지면 될 일들입니다.

더 힘든 것은 마음입니다. 40년을 살아온 북조선에서는 나누는 삶이 있었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조선 사람은 인정이 있어요. 서로 도와주고 했는데, 많이는 도와는 못줘도 하나 있으면 나눠먹고.”

지금은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핏 속으로는 일본 사람인데, 심장 속으로는 북조선 사람이 다 되어버린 것일까요.

우에다 즈타에: “조선에서는 암만 없이 살아도 인정이라도 많아요. 일본에 오니까 사람이 차다는 것... 아파트 살아도 옆에 사람 살아있는지도 몰라요. 아침에 마주칠 때 있잖아요. 인사해도 받지도 않아요. 일본 사람들 우리 있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없이 살아도 조선 사람들이 정말 인정이 있어요. 먹을 게 없어서 그렇지 사람들 관계는 조선이 나아요."

굳이 북조선에서 왔다고, 이웃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이토 히로코: “나는 와서 8월에 와서 10월 달에 일했거든요. 그 때는 조선에서 왔다 안 하고, 중국에서 귀국해 왔다, 이렇게 해서...”

사이토 히로코 씨는 반찬 장사를 하고, 우에다 즈타에 씨는 정부에서 노인들에게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한 정부지원금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물질적인 어려움도, 사실 견딜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처럼 적어도 이 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지는 않으니까요.

아직도,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바로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 때문입니다.

우에다 즈타에: “손자가 12살인데 먹지 못하고... 일본에 와서 뭐라도 조금 먹으면, 음식이라도 좋은 거 먹으면 그거 목이 메여서, 생각이 나서 정말 못 먹겠어요. (울음) 손자들이 불쌍해서...”

현재까지 일본으로 돌아온 이들 재일동포와 일본인 처, 그 자식들은 1백7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올해 들어서만 20 여 명이 중국과 제 3국을 거쳐 힘들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북한에서 살다 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걱정에, 이제는 새롭게 시작된 또 다른 그리움에 목이 멥니다.

한 평생 북한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등지고 온 일본의 가족들을 그토록 보고 싶어하며 애태웠는데, 이제 일본에 돌아와 북조선의 산하와 없이 살아도 마음을 나누고 살았던 따뜻함, 그리고 또 다시 등지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 하게 된 것입니다.

우에다 즈타에, 사이토 히로코: “(남아있는 가족들) 왔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서 안타까워 죽겠어요. 가족들이 같이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니... 어쨌든 왔다 갔다 하겠끔 그거 바라보고 있어요.”

'미국의 소리' 방송이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로 전해드리는 연속보도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그 네번 째 순서로, 탈북 재일동포와 일본인 처들을 수 년 째 도와온 일본 내 시민단체와 학계 관계자들의 견해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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