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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 - 종합


지난 1959년 시작된 재일 조총련의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갔던 재일동포의 일본인 아내들이 이제는 백발이 돼 잇따라 북한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생활고에 이어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들의 사연을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를 통해 연속 기획으로 방송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현재 중국주재 일본대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올해 80살의 탈북 일본인 처, 세끼도 에쯔꼬 씨의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세끼도 씨는 지난 9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지내다 최근 베이징주재 일본대사관에 귀국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보도에 서지현 기자입니다.

1960년 10월, '북조선'으로 향하는 제41차 귀국선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북한에서 '리열자'라는 이름으로 47년을 살아온 일본인, 세끼도 아쯔꼬 씨. 올 해 80살의 백 발이 성성한 그 녀에게는 지금 반 세기만에 일본, 내 나라 내 땅을 다시 밟고 싶다는 단 한 가지 소망 뿐입니다.

지금, 꼭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묘부터 가야되죠... (울음)"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것,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47년 전 북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은 것은 단지 그 이유 뿐이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갔어요, 조선에. 어머니, 동생한테 말하면 못 보내줬단 말이에요. 말 하면 집에서 못 보내줍니다. 나쁜 여자지요.”

나쁜 여자이자, 당찬 여자였습니다. 그 날 조국을 등졌던 그녀는 15살 때부터 5년 간 조국, 일본을 위해 태평양 전쟁에 간호병으로 참전했던 군인이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본에 돌아온 스무 살, 전쟁에 참전했던 더러운 여자라고 결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데 가면 좋은 일 했는데, 군관들이나 군대 높은 사람을 아니까 몸이 다쳤는가 생각하고... 그런 것 없었어요.”

스물일곱살이나 많은 대만 국적의 무역상에 팔려가다시피 결혼해 아들 셋을 낳고 살던 어느 해였습니다. 조선 남자 '리재철', 그를 만난 것은...

조총련의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돌아간 그를 좇아 전 남편과 사이에 낳은 아들 셋을 데리고 배에 올랐습니다.

못 온답니다. 그 사람은 조선 사람인데 먼저 갔는데, 우리 일본 사람 조선에 보낼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조선총련이. 일본 정부가 스위스 적십자를 소개해줬습니다. (그랬더니) 41차 귀국선으로 귀국하라고.”

리재철, 북한 땅에서 다시 만난 그는 김책제강소에서 권투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북조선에서의 삶은 그러나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었어요. 배급 주고... 나도 김책제강소에서 일했습니다."

몸보다는 데려간 아들을 의붓자식이라고 미워하는 남편 탓에 마음 고생이 더욱 심했습니다.

“72년도에 이혼했습니다. 아들을 계속 미워해서, 데려간 아들 미워해서...그래서 계속 이혼해주세요, 이혼해주세요 제기했는데, 일본 사람은 이혼 못한다고 해서, 계속 이혼 못했습니다. 그런데 72년도에 이혼해줬습니다.”

북조선의 아낙으로 그렇게 수십 년을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조국, 일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의붓 아버지에게 한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조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채 '조선인'으로 살아온 큰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였습니다.

“못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도 다 있고 한데 어떻게 오겠습니까. 훈장도 있고... 얘 아버지가 5월 달에 사망하고.... 결심을 했단 말이에요. 얘 아버지가 효자지요... (우는 소리) 죽는 걸... 못 봤단 말입니다. 죽었단 말입니다.”

돌아가야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동무들이 많아요, 일본 사람도 그 때는 많고, 김책엔 많았댔어요 여자들이. 남편 따라서 다 온. 그 사람들 다 죽는 사람도 많고...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왔던 일본인 동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제는 죽기 전에, 조국 땅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라도 말입니다.

“야, 내도 죽는 가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물이 와서, 막 심장이 뛰고 야... 건넜어요. 처음에 들어갔는데 신발이 다 나가고 없어...”

기차를 타고, 어둠 속에 산 길을 걷고, 또 걸어 도착한 이 곳, 또 다른 남의 나라 중국. 그러나 일본으로 금세 갈 수 없습니다. 복잡한 외교관계로 중국의 일본대사관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에는 앞으로 몇 개월이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탈북 이후 베이징 일본대사관의 보호를 받기 전까지 지난 두 달 간 중국 공안에 붙잡히면 어쩌나, 무엇보다 함께 탈북한 손자까지 붙잡혀 북송되면 어쩌나, 잠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총살 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얘 아버지가 나한테 잘해줬는데, 조선에서 낳아서 조선 교육을 받고 조선에서 많이 받고... 나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같이 가서 할머니 가는 것 보고 오겠다'고 그래서 같이 온 건데...”

손자 역시 붙잡힐 걱정에, 할머니 건강 걱정에 하루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손자: “나오면 빨리 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못가게 되니까 지금 할머니 심리상태가 아주 나쁜 상태라는 거죠. 불안해 하고, 어제도 할머니가 몇 번 졸도했거든요. 어떻게 하던지 하루라도 빨리 지금 가야하는데...”

하지만 복잡한 외교적 절차로 일본대사관을 통해 언제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 기약이 없습니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말에, 세끼도 에쯔꼬 씨는 목이 먼저 메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 뭐…”

그 때,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태어난 곳, 일본 땅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 생전에 불효한 어머니 묘에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는 80살 노파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기까지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드리는 연속 기획보도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그 두번째 순서로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고국 일본을 떠났던 이유와 다시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북한에서의 생활상 등을 전해드립니다.

(후속 기사는 오른편 '후속기사'를 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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