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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 100년의 발자취] 해방후의 유학생과 국제 결혼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시는 김지수 씨를 모시고 100년이 넘는 한인들의 미주 이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해방후 유학생과 국제 결혼에 관한 얘기 전해 드립니다.

미국은 1965년 이민법을 개정할 때까지는 서양인 이민과 달리 용모와 언 어, 문화 그리고 생활 관습이 완전히 다른 동양계 이민은 연 100명씩 밖에 받지 않을 정도로 제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한국으로 귀국했을 뿐, 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 은 거의 없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미국으로 도미한 유학생은 1964년까지 3천2백 78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들의 5%만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고 나머지는 미국에 남아서 영주권, 시민권을 받아서 재미 한인의 일원이 됐습니다. 1965년 새 이민법이 발효되면서 이들 유학생 출신 한인이 가족을 초청해서 재미한인 사회의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 실시하는 유학시험을 치르고 정식으로 유학 온 유학생과 방문비자로 도미해 현지에서 학생비자로 변경해 유학생이 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 유학생은 학업을 마치고 여러 경로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고 시민권을 얻어 가족을 초청하게 됨으로써 유학생 출신 가족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또 1950년 한국 전쟁을 통해 미국이 한국전에 참가하면서 미국 군인이 한국 여자와 국제 결혼하는 사례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결혼한 한국 여자들은 대부분 학력이 낮고 가정 환경이 어려운 여인들로 대부분 미군 부대 부근의 술집에서 일하거나 미군을 상대로 매춘하던 여인이 많았습니다. 물론 일부는 간혹 고등교육을 받아 미군 부대에서 사무직원으로 근무하다 미군과 국제 결혼을 한 여인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전쟁신부법'을 적용, 보완해 '병사애인법'을 제정했습니다.

"미국 군인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은 1950년 10월부터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를 시작한 이래 해마다 증가해 1956년에는 500명에 달했고 1958년에는 1,000여 명 등 약 50,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속칭 '양공주'라고 일컫는 한국 여자들은 미국에서 장보기, 자동차 운 전 등을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의 괄시가 심했으며, 일부는 이혼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국제결혼과 양자 입양에 관한 얘기 전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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