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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 후 1년, 정세변화


이번에는 북한의 핵실험 이후 오늘까지 지난 1년 간의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지현 기자가 나와 있습니다.

문 : 지난해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 이후 지난 1년 간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1년 전 최악의 순간을 지난 오늘, 2007년 10월9일에는 최상의 남북 관계, 북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한데요. 어떻습니까.

답: 북한의 핵실험 이후 지금까지 북 핵 문제를 둘러싼 남북 관계와 국제사회의 정세변화를 살펴보면 '벼랑 끝의 반전'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우선, 시간을 1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은 10월9일 오후 5시, 지하 핵실험 사실을 공식 발표했는데요. 당시 방송 내용, 직접 들어보시죠.

[조선중앙방송: 온 나라 전체 인민이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에서 일대 비약을 창조해나가는 벅찬 시기에 우리 과학연구 부문에서는 주체 95년 10월9일,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

이에 앞서 10월3일 북한 측의 핵실험 계획 발표로 긴장해 있던 한국 정부는 군 태세를 긴급 정비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측에 일종의 경고를 한 셈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대북 포용정책의 전면적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해석됐고, 자연히 이후 남북 관계는 극도로 경색됐었습니다.

문: 한국 정부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실험을 전후해 국제사회 역시 매우 강경한 반응을 보였죠?

답: 그렇습니다. 북한은 핵실험에 앞서 지난해 10월3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핵실험 계획을 발표했고, 이 발표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이 핵실험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는 의장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안보리는 북한이 실제 핵실험을 벌인 뒤 5일만인 10월14일, 대북 제재 결의안 제1718호를 채택합니다.

문: 이후 12월에는 6자회담이 재개됐었죠? 하지만 현재의 순조로운 북한 핵 문제 상황을 가져온 가장 큰 전환점은 올해 1월의 미-북 간 베를린 회담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답: 네. 지난해 10월31일, 북한과 미국,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극비 회동을 가졌었는데요.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전격적인 6자회담 재개 합의에 따라 이후 지난해 12월, 13개월여 만에 6자회담이 다시 열렸습니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습니다.

큰 전환점은 말씀하신대로 북한과 미국,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가 모인 2007년 1월 베를린 회동에서였습니다.

김계관 부상과 힐 차관보는 이 회동에서 방코델타아시아 BDA문제를 해결하고 영변 핵 시설을 폐쇄하는 비핵화 1단계에 합의했고, 이후 2월8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제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에서 북한의 핵 시설 폐쇄 등 6개국 공동성명 합의문이 발표되는 데 이릅니다.

이후 북-미 관계 역시 급진전 되는데요. 6월21일 미국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북한은 7월 핵 시설 가동 중단에 착수했습니다.

문: 그런데 지난 1년 간의 미-북 관계 변화에는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 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이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는 주장이 여러 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됐었는데요.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의 존 오버도퍼 교수는 북한의 지난 해 10월 핵실험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미국 쪽에서 보자면 북한에 집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미국의 내부정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는데요. 지난해 11월8일 중간선거에서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은 패배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후 대북 강경 정책을 주도했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전격 경질했었죠. 이로써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서서히 몰락하고, 민주당 의원들이 의회를 장악해 외교정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 1기에서 대북 교섭 담당 대사를 지낸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은 부시 대통령 주변의 대북 강경파들이 물러남에 따라 힐 차관보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북 핵 문제를 자신의 임기 내에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었는데요. 이라크나 중동 사태 등 주요 외교정책이 사사건건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서 부시 행정부 스스로 무턱대고 강경론만 펼칠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태가 해결이 되는 방향으로 북 핵 문제를 바라보게 됐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문: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북한이 아닐까 싶은데요.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유화적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답: 네, 지난해 7월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10월의 핵실험... 벼랑 끝으로 가고 있던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IAEA 사찰단을 처음으로 북한 내에 초청하고, 또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전면 신고 등의 구체적인 문서화에 합의하는 등 1년 전과 상당히 다른 태도를 보여준 데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살기 위해서'라는 주장입니다. 미국의 금융제재 압박과 계속되는 경제난, 식량난에서 비롯되는 느슨해진 체제 등 여러 톱니바퀴가 맞물려 결국은 핵 폐기에 합의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연세대학교의 문정인 교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진정으로 변한 것을 깨닫게 된 것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문: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변화는 특히 최근 한 달 사이가 괄목할 만 한 것 같은데요. 지난 달 말에는 6자회담 2단계 회의, 또 지난 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이같은 순조로운 흐름이 안정화되는 느낌입니다.

답: 네.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와 영변 5 메가와트 원자로, 재처리시설, 핵연료봉 제조공장 등 주요 핵 시설 불능화를 연내에 이행한다는 북한의 약속을 문서화 했습니다.

또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7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해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6자회담을 통한 북 핵 문제 진전과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남북 관계 진전으로 지난해 채택된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의 완화나 해제 여부까지 관심사가 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문: 그러나 부침을 거듭했던 남북 관계나 미-북 관계가 완전한 안정궤도에 오르려면 앞으로 북한의 6자회담 합의 사항 이행 추이 등 지켜봐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와 제이슨 샤플란 전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 KEDO 정책 자문위원은 8일 미국의 '뉴욕타임스'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1년 간의 북 핵 문제 진전의 속도는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면서 필요에 의해서든, 욕심에 의해서든 북한은 진정으로 국제사회와의 관계개선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 달성은 1년 전보다는 현재 더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걸림돌이 남아있다고 밝혔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 북한에 쌓여있는 핵 물질, 50 kg 상당의 플루토늄이며, 핵 폭탄 10개 정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 핵 물질의 처리 여부는 여전히 위협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지금까지 서지현 기자와 지난해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 이후 지난 1년 간의 남북 관계와 국제정세 변화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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