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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 이영희 씨] 이민인생 40 년…한국에서 브라질로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1966년 3월, 네델란드 소속의 이민선 루이스호가 부산항을 출발했습니다.

거대한 이민선에 몸을 싣고50여일 동안의 긴 여정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는 스물여섯살 이영희 씨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은행에서 일을 하던 이영희 씨는 먼저 이민 간 부모를 쫓아 지구 반대편의 낯선 나라 브라질로 향했습니다.

이영희 씨: “삼촌이 먼저 가셔서 보니까 참 넓고, 참 좋은 나라다, 모든 게 다 풍부하고…가족이 한꺼번에 다 가지 못하고, 20세 미만은 부모님하고 같이 갈 수 있고 20세 이후는… 그 때 오빠는 결혼을 했었고… 그러니까 다 이렇게 세네번에 모두 다 갔어요.”

1966년 5월 6일, 이영희 씨는 지구 반바퀴를 돌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이영희 씨 가족은 리우에서 5백 킬로미터 떨어진 브라질 최대의 상업도시 상파울루에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이영희 씨: “일본 이민이 많았어요. 거기가..아버님이 일본말을 잘 하시니까 그 일본 사람들하고 통해 가지고 그래도 처음에 일본 사람 노부부 꽃집을 인수하시게 돼가지고 그걸 쭉 같이 하셨죠....”

생각보다 꽃집 일은 쉽지 않았다고 이영희 씨는 회고합니다. 부모님을 도와 일하면서 싱싱한 꽃을 구하기위해 새벽부터 꽃시장으로 달려가야 했고, 매일 무거운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것도 큰 일이었습니다. 장미를 다듬으면서 수도 없이 가시에 찔렸고, 손가락이 따가워 밤에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브라질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갈 무렵, 이영희 씨는 부모님의 주선으로 이호영 씨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이영희 씨: “부모님들 먼저 가셨으니까 모두 이렇게 저렇게 아시게 되니까, 우리 시부모님하고 아버님하고 잘 아시고.. 쉽게 중매로 그렇게 해서 몇번 만나고 결혼하고…”

결혼 당시 남편 이호영 씨는 머리핀 등을 만드는 작은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영희 씨: “처음 남편이 도착했을 때 참 그 때 취직이 어려웠대요. 그러니까 막노동이죠. 공장의 최하, 최저 봉급으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을 해가지고.. 고개 너머로 여러가지 기술들, 제품 만들어 나오는 거 그런 거 다 보고.. 몇 년 후에 자기가 공장을 조그많게 시작을 한 거죠. 기계를 사가면서… ”

장마철 어렵게 운영하던 공장에 물이 차는 바람에 기계가 다 못쓰게 되면서 절망에 빠지기도 했었다고 이영희 씨는 말합니다.

이영희 씨: “한번 물에 들어간 기계는 전체를 열어서 다시 또 기름으로 다 닦아서 해야되는데 그게 한두번 들어오면 되는데 그냥 찔끔찔끔은 수도 없이 들어오고 한번은 아예 중간쯤.. 배 타고 저기하게끔.. 그 때 완전히 손을 떼고 그 공장을 버리다시피 하고 딴 장소에 새로 또 옮겼죠.”

이영희 씨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으로 기계 자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영희 씨: “그 때 브라질의 제품집들이 수를 안 놓으면 물건이 나가지않을 정도로 그렇게 수가 대유행… 어린애 옷들 앞가슴 주머니 같은데.. 한국 사람들이 그 때 전부 그거에 밀려다니는 거죠.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분이, 집에서 자기도 수를, 자기 처가 한다고 그러면서 그냥 물, 공장에 들어오고 손해를 많이 보고 하니까 자기네가 기계 한 대를 그냥 주면서 시작을 하라고…”

제대로 재봉틀을 다룰 줄도 몰랐지만 한푼이 아쉬웠던 이영희 씨는 열심히 배워가며 일을 했습니다. 아이들 옷에 예쁜 꽃이나 동물을 수놓고 나면 작품 하나를 해냈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력이 늘면서 일감도 늘어났고, 약속 날짜에 맞추기 위해 밤을 지새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이영희 씨: “이 물건을 놓고 손을 이렇게 해서 박을 때 조니까… 졸면서 꼭 이 손가락을 그냥 막 박는 거에요. 와당탕, 와당탕… 며칠에 한번씩 다 낫기도 전에 또 그러고, 낫기도 전에 또 그러고.. 그런데 제가 그것도 좀 덜 가져오면 여유있게 자면서 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1백장 하다가, 1백50장 하다가, 2백장 하다 2백50장 하다, 자꾸 늘려나가는 거에요. 그게 제 욕심이에요. 제 욕심에서 제 손가락을 많이 박았어요, 좀… ”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볼 때면 절로 신세타령이 나오기도 했지만 기계수 덕택에 집세도 낼 수 있었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도 사줄 수 있었다고 이영희 씨는 말합니다. 플라스틱 단추가 유행하면서 남편이 운영하던 공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 이영희 씨 부부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미국 이민을 결심합니다.

이영희 씨: “미국에도 저희 친척들이 좀 계셨어요. 그리고 동생도 미국에 먼저 와 있었고.. 그래서 86년에 무조건 여행자로 왔죠. 동생, 그 형제 초청은 10년씩 막 기다려야 되니까 여행자로 와가지고 여기서 다른 방법으로 해보자 했는 게 결국은 동생 초청으로 영주권을 받게 됐어요.”

이영희 씨는 미국 뉴욕에서 세번째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영희 씨 부부는 뉴욕에 도착한 뒤 3개월 동안 사업체를 찾다가 런드로맷, 동전 세탁소를 인수하게 됩니다.

이영희 씨: “브라질에서는 공장을 했지만 미국에선 도저히 그게 힘들 것 같고.. 기계를 다루는데서 좀 일을 했으니까 세탁 기계를 좀 만지는 걸 생각을 하면서 그것이 제일 우리가 적당할 것 같다 그래서 런드로맷을 쭉 돌아보니까 정말 기계의 그것만 하면 동전 바꿔주고 자기네가 와서 빠는 거니까 쉽겠다 하고서...”

손님들이 빨래를 들고 와서 직접 동전을 넣고 세탁기나 건조기를 돌리는 런드로맷.. 세상에 쉬운 일은 없더라고 이영희 씨는 말합니다.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공휴일도 없이 1년 365일 계속 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손님들을 상대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탁물을 분실했다고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영희 씨: “떼쓰는 거죠. 기계 많이 틀어놓고 막 빨래가 안 됐다, 뭐 돈을 넣었는데도 안된다, 이런 거짓말.. 그런데 우리는 전 재산을 들여서 시작을 했으니까 얘네들하고 친하는 것 밖에 없죠. 그러니까 한 번씩 그렇게 나쁘게 그러는 사람을 다 프리로 받아주면서 잘 대해주고, 다 해주고… 자리가 잡혀가면서 걔네들이 우리를 조금씩 알고,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구나..”

이영희 씨는 나이 많은 손님이 멀리서 오는 게 보이면 달려가서 짐을 들어주고, 부축해주기도 하면서 조금씩 손님들에게 다가갔다고 말합니다.

이영희 씨: “그 동네가 다 그러니까 친척이고 오래 거기서 난 사람들이고 그렇더라구요. 한 사람에게 잘못한 게 열 사람한테 나쁘게 되고, 또 한 사람에게 잘 한 것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좋게 되고 그런 것을 있으면서 느꼈어요.”

이영희 씨는 얼마전 한 여성단체가 주관한 이민생활 체험수기 공모전에 응모해 당선되는 기쁨을 안았습니다.

이영희 씨: “신문을 제가 열심히 보거든요. 보는데 어느날 여성 수기 모집, 여성 이민생활..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40년이나 넘는 이민생활을 했는데, 떠났을 때부터 지금 현재까지 그걸 한 번 그대로 써보자..”

이영희 씨는 막상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자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웠다며 앞으로 체계적으로 문학수업을 받고싶다고 말합니다.

이영희 씨: “앞으로 책을 좀 읽어야죠. 남의 글을 많이 읽고, 책을 읽고 그러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쓰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영희 씨 부부는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았습니다. 남편 이호영 씨는 늘 참고 따라와준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고 말합니다.

이호영 씨: “특별한 것 보다도 그저 불평없이 잘 참고 노력한 거 그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죠.”

결혼후 7년 만에 얻은 쌍둥이 남매는 어느덧 성장해 각각 의사와 검안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고된 이민생활 속에서 불평 한번 하지않고 잘 자라준 아이들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이영희 씨는 말합니다.

이영희 씨 부부는 지난 2004년 친손자가 태어나자 18년 동안 운영해온 동전 세탁소를 정리하고 아들 내외가 살고있던 버지니아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인생의 추수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이영희 씨, 손자들을 생각하면 먹지않아도 배가 부르고, 어떤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다며, 이제 이 소중한 열매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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