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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 손영환 씨] 1천달러 자본금으로 10년만에 매출 2천억 달러 기업 일으켜


겨우1천달러의 사업자금으로 회사를 차려 10년 안에 매출액 2천억 달러 규모의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한인이 있습니다. 1980년대초 메릴랜드주에서 International Computers and Telecommunications, ICT를 창설하고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로 발전시켰던David Y. Sohn, 손영환 씨입니다.

한국에서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언론계에 몸 담았던 손영환 씨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에 1968년 미국으로 유학 왔습니다. 컴퓨터 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박사 과정에 들어갔지만 공부와 직장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워 잠시 공부를 미루게 됩니다.

//손영환 씨//

“1972년제 제가 석사학위를 하고 사실은 박사 과정은 풀 타임 레지던스 리콰이어먼트.. 제가 애들이 둘이고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레지던스 리콰이어먼트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 살다 보니까 이제 영주권 나오고, 또 시민권 나오고.. 그래서 사실 못 갔죠.”

한국군 육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미 육군 통신학교에 파견돼 교육을 받기도 했던 손영환 씨는 남들보다 컴퓨터를 다뤄본 경험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방면의 지식도 풍부해 여기저기서 오라는 곳이 많았습니다. 컴퓨터, 통신 분야 미국 회사에서 일하던 손영환 씨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중 차라리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손영환 씨//

“미국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제가 책임감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항상 늦게 남아서 일을 해야되고 또 주말에도 일을 해야되는 그런 부담이 많아서 내가 내 비지니스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나 참 성공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1981년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나온 손영환 씨는 아내에게 1천달러를 투자하라고 설득해 컴퓨터 통신 관련 회사인 ICT를 설립했습니다.

//손영환 씨//

“국제적인 그런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우선 저 인터내셔널 (international, 국제).. 그런 말이 들어갔으면 좋다고 생각하고, 내 전공이 컴퓨터와 통신이기 때문에 ‘인터내셔널 컴퓨터스 앤 텔레컴퓨니케이션스 (International Computers and Telecommunications, Inc)’… 쇼트 네임으로는 ICT라고 이렇게 지었죠.”

직원이라곤 사장인 손영환 씨 한 명 뿐이면서 회사 이름이 너무 거창한 것 아니냐는 부인의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손영환 씨는 관련경험과 지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손영환 씨//

“미국 사회가 다른 나라보다 좋은 것이 열심히 일하면, 사회, 퍼블릭에서 알아주는, 그런 것이 더 많다 이렇게 생각해서, 제가 열심히 일하고 커스터머한테 좋은 프로덕트와 좋은 서비스를 줄 때는, 커스터머는 잡을 준다든가, 컨트랙트를 주는..”

고객이 왕이라는 경영 철학 아래 신용과 품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손영환 씨는 ICT를 10년 만에 매출 규모 2천만 달러, 직원 수 2백여명이 넘는 큰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ICT는 1994년에는 경제 전문지 The Inc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개인기업 5백개 회사 가운데 76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는 부인 손목자 씨의 도움이 컸다고 손영환 씨는 말합니다.

//손영환 씨//

“우리 와이프는 사실 고생을 많이 했는데… 제가 공부하느라고 공장에 가서 일하면서 학비를 대고, 생활비를 대고 그랬는데…”

한국에서 약대를 나와 약사로 일한 경력을 갖고있던 손목자 씨는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해 약사 자격증을 따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남편 사업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손영환 씨//

“내가 이 컴퓨터 분야 사업을 하기 때문에 와이프 (wife, 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거야.. 그래서 이 컴퓨터 회사가 잘 될 때는 약사로 일할 필요가 없지않느냐 뭐 이렇게 설득을 해서 사실은 약사 공부를 못하게 했어요, 내가.. 와이프는 그 쪽은 떠나고 컴퓨터 공부를 좀 해가지고 회사를 위해 나중에 일을 많이 했지요.”

손영환 씨는 한 때는 국방부 등 미국 연방정부 관련 계약이 ICT 사업의 90 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미국 연방항공청 – FAA의 하청을 맡아 돌풍감지 경고장치를 개발해 미국내 각 공항에 설치한 것과 한국 인천공항에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손영환 씨 7//

“1백10개 공항이 있는 65개 공항에 우리가 이 돌풍장치를 설치했어요. 그걸 토대로 해서 우리가 인천 공항, 한국의 인천공항에 가서 돌풍장치도 설치해주고, 또 안전장치, 그 다음에 모든 레이다, 통신, 컴퓨터 컨트랙트, 우리가 프라임 컨트랙터로서 설치, 운영하는 걸 감독을 했어요. 인천공항 프로젝트를 9년간 했죠.”

손영환 씨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내 한인 이민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한인들의 미국 주류사회 진출을 돕기 위해 1980년대말에 월간지 ‘미국생활’을 내기도 했습니다.

//손영환 씨//

“역시 그 미국의 메인스트림 (main stream, 주류)에 살기 위해서는 미국 실정을 잘 알고 미국생활에 적응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저는 쭉 갖고 있었는데…. 특히 1.5세, 자기 후세라든가, 2세들이 미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미국 생활을 잘 해야 되겠다, 이것을 간접적으로나마 교육을 해야 되겠다, 이런 차원에서 잡지를 시작을 해서 전국적으로 배부하는 그런 역할을 했죠.”

손영환 씨는 ‘미국생활’과 더불어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아시아 퍼시픽 카운실 (Asia Pacific Council)을 설립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미국 주류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인들을 발굴해 소개했습니다.

//손영환 씨//

“롤 모델 발굴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서,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컴뮤니티 서비스, 그 다음에 교육 등 열개 분야를 선정을 해서.. 한국 교포 중에서 각 분야에 정말 메인 스트림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활약하는 사람이 누구냐, 이것을 제가 정말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발굴을 해가지고 1년에 한번씩 시상식, 메인 스트림 어메리카 어워드라는 그런 시상식을 했는데…”

그 첫 해 시상식에서 ‘올해의 한인상’을 받은 사람이 당시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 시장으로 나중에 미국 연방 하원을 지내기도 했던 김창준 씨였습니다.

미국내 한인들의 주류사회 진출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월간지 ‘미국생활’은1년에 5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가운데서도 계속 발행됐지만 결국 5년 만에 폐간됩니다. 기자 출신으로 편집에 적극 관여했던 손영환 씨가 회사 확장 관계로 출장이 잦아지면서 더 이상 신경을 쓰기가 어려워졌던 것입니다.

//손영환 씨//

“한국을 향수, 우리가 여러가지 문제로, 조국을 잃어버릴 수는 없지만, 프라이어러티는, 특히 자손을 위해서는 미국 주류사회에 둬야 된다.. 이런 것을 초기부터 잡지를 통해서, 뱅큇을 통해서 많이 교육시켰다, 이렇게 저는 생각하고 있죠.”

손영환 씨는 2000년 ICT를 운영하면서 바이오 메트릭스 (bio metrics), 생체인식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손영환 씨//
“아이리스 레코그니션 (iris recognition)이라고 그래가지고 눈동자, 그 다음에 얼굴, 쉽게 얘기하면 DNA로 생각하면 돼요. 사람 마다 눈동자라든가, 얼굴이 아주 유일한 분자를 갖고있기 때문에 그걸 디텍숀하는.. 그래서 사람을 확인하고 이런 절차인데…. 그 1년 후에 9.11이 딱 터지고 나니까 이 바이오 메이트릭스 분야가 굉장히 획기적으로 레코그나이즈 되고 디맨드가 커졌죠. 제가 이제 ICT하고 사실은 두 회사를 하다가 ICT를 팔고 여기에 더 주를 둬야 되겠다, 여기가 지금 큰 비젼이 있다고 생각하고 2000년도에 OmniBio를 시작한 거죠.”

옴니바이오 시큐어 회사를 운영하면서 손영환 씨는 앞서 못다 했던 박사 공부를 시작합니다.

//손영환 씨//

“우리 어머님이 90세로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부터도 너는 언제 박사가 되느냐 이런 얘길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난 지금 박사보다도 더 큰 회사 사장인데 이런 식으로 어머님을 위로시켰지만은 제 맘속에는 뭔가… 제가 이제 어메리칸 드림을 성취했다 자부도 갖지만은 아마 이건 내가 안 한거다, 그래서 이것을 정말 다 할 때, 내가 박사 학위도 받고 이럴 때 한국에 나가서도 친구들한테 이제 박사다하는 떳떳한 것도 있을 것 같도…”

2005년 피닉스 대학교에서 기업경영 박사 학위를 취득한 손영환 씨는 현재는 피닉스 대학교 등 몇몇 대학교에서 경영학과 국제경영 과목 등을 가르치며 후세 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손영환 씨는 또 내년초 발간을 목표로 미국 사회의 장단점을 밝히는 책도 집필중입니다.

//손영환 씨 14//

“미국 사회를 내가 많이 봐왔기 때문에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 점도 많아요. 내 책을 통해서 좋은 점은 좀 장려해주고, 나쁜 점은 좀 시정하는 그런 역할, 어떻게 보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해야 되겠다, 그런 욕심으로 책을 쓰고 있어요.

육군 장교에서 언론인으로… 첨단 컴퓨터 통신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한 기업인에서 대학 교수로… 이제 또다시 작가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손영환 씨.. 끊임없는 도전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우뚝 섰던 손영환 씨의 다음 선택은 무엇일 지 자못 궁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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