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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100년의 발자취] 김형제 상회 III - 과수업으로 성공해 한인 사회에 큰 기여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시는 김지수 씨를 모시고 100년이 넘는 한인들의 미주 이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과수 농장과 과일포장 수송업체로 크게 성공을 거둔 김형제 상회 공동 설립자가운데 한사람인 김호의 업적에 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

"김호는 1920년부터 김형순 한덕세 부부와 동업으로 김형제상회를 경영하면서 교회와 지역 한인사회 발전에도 이바지 하다가 하와이 지역 국민회의 내분으로 제구실을 못하던 국민회중앙총회 재건 사업을 해서1938년에 북미국민회를 LA로 이전해 현재의 자리에 회관을 건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김호는 1941년 한족연합회 창설을 주도해 1945년 해방될 때 까지 한족연합회 집행위원장으로 재직하며 무수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해방후에는 한족연합회 대표로 귀국해 1946년부터 1948년 제헌국회가 탄생할 때까지 남조선과도입법위원에 피선되 적산분과위원장으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과의 충돌로 미국으로 돌아오게됩니다.

"김호는 남북한 영구분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남북 통합 정부구성을 주장한 반면에 이승만은 UN의 결의대로 총선거를 거부하는 북쪽을 제하고 선거가 가능한 남쪽이라도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5년 해방 직전 외교문제로 미국에서도 크게 갈등했던 두 사람은 다시 충돌하게 되는데 결국 이승만이 집권하게 되자 이승만과 다른 의견을 가졌던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 미 군정이 김호를 미군 비행기편으로 다시 미국으로 귀환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미국으로 귀한한 김호는 본업인 농장 일에 충실하며 동업자인 김형순과 같이 1957년에 장학재단인 Korean Foundation을 설립하여 한인 유학생을 많이 도왔는데 당시 혜택을 받은 유학생은 83명에 달했습니다.

김호는 후에 미주 한인의 이민 역사를 정리 발간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8년간의 자료수집기간을 거쳐서 1959년에“재미한인오십년사”를 발간했습니다. 또한 김호는 자신의 추종세력인 국민회원과 이승만의 후원세력인 동지회원이 손잡고 초기의 한인 회관을 세우는 주도적인 역할도 담당했는데 이는 미주 한인 이민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김호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습니다.

또한 LA시는 김호가 미주 한인사회와 미국 사회에 세운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2006년 8월 한인타운에 새로 개교한 초등학교의 이름을 김호의 미국 이름을 따서 Charles H.
Kim Elementary School로 정했습니다.

이는 미국에 한국인의 이름을 딴 최초의 공립학교가 됩니다. 다음 주 이시간에는 1941년에 결성된 한족연합위원회에 관한 얘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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