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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안선희 씨 – 워싱턴 내 복권판매 6위 상점 '일주일의 행복을 팔아요'


워싱톤 디씨 시내에 있는 편의점 ‘갤러리 숍 (Gallery Shop)입니다. 파워볼 복권 최고 당첨액이 2억4천5백만 달러, 한화로 무려 2천억원을 넘어선 가운데 복권을 사려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습니다.

‘갤러리 숍’ 주인인 한인 안선희 씨는 복권 당첨액이 커지면 손님들이 크게 늘기 마련이지만, 평상시에도 정기적으로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안선희 씨//

“더구나 이 동네가, 여기가 이제 그 정부, 가번먼트 (gevernment, 정부)직원들이니까 사기업 보다는 샐러리 (salary, 봉급)가 많지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뭐, 일주일의 행복이랄까? 그런 식으로 자기네들도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나 사놓고 기대하는 거.. 터질 때까지 기대하는 거.. 그래서 그런 지 하여튼 많이 사요, 이 사람들이…”

안선희 씨가 남편 안승수 씨와 함께 8년째 운영하고 있는 편의점 ‘갤러리 숍’은 워싱톤 디씨에서 지난 해 가장 많이 복권을 파는 가게 6위 안에 오를 정도로 복권을 많이 팔고 있습니다.

파워볼 복권과 즉석 복권 다섯장을 구입한 한 손님은 일주일에 두 번씩 꼭 복권을 산다면서, 당첨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번 노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부탁으로 복권을 사러 나왔다는 한 손님은 복권에 당첨되면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과 아이들의 변호를 무료로 해줄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그 돈으로 투자하겠다는 사람, 집을 수리하겠다는 사람, 빨리 은퇴를 하겠다는 사람 등 복권 한 장에 많은 꿈이 실려 있습니다.

복권 당첨은 벼락 맞기보다도 어렵다고 알려진 만큼 하루에 수백장을 팔아도 당첨됐다는 얘기는 듣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갤러리 숍’ 에서 복권을 사 간 손님들 중에 10만 달러에 당첨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선희 씨//

“지금 그 사람 딴 데 가서 일하는데 여기 너스 (nurse, 간호)무슨 그런 회사가 있었어요. 10만불 짜리 스크래치 맞아서 세금 제하고 8만불인가 7만불 탔대요. 그래서 타운하우스 다운 페이 해갖고 들어갔어요.”

“아, 저도 스크래치 복권 한 장 주세요.”

“스크래치? 5불 짜리 하나요? 굿 럭 하세요. (Good luck, 행운을 빌어요).”

“아, 역시.. 안됐네요.”

1달러 짜리 복권 한 장을 팔아서 얻는 수익금은 5 센트, 극히 미미한 액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복권 판매는 손님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안선희 씨는 말합니다.

//안선희 씨//

“한 5퍼센트, 진짜 없는 거죠. 5퍼센트 마진, 거의 서비스업인데.. 이제 많이 팔면 그래도 좀 되는데.. 많이 파는 것 보다도 매일 찍는 사람들은 중독일지 몰라도 굉장히 기대감이 커요. 그래서 그걸 뭐, 그 숫자를 그 날 꼭 가져야지만 안심을 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안선희 씨는 1981년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습니다. 안선희 씨의 남편 안승수 씨는 역시 간호사로 미국에서 일하고 있던 누나의 초청으로 이미 미국에 이민 와 살고 있었습니다.

//안선희 씨 //

“저는 남편이 먼저 미국에 1년 전에 왔었어요. 그 다음에 한국에 나와서, 결혼해서 들어왔어요, 저는.. 80년도에 결혼하고, 80년, 81년쯤에 들어왔어요. 81년 7월달에 들어왔어요.”

안선희 씨는 결혼해서 미국에 온 다음날, 시차에 적응할 사이도 없이 가게에 나와 일을 배웠습니다.

//안선희 씨//

“이제 왔는데 그 때 남편이 이런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제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가게를 시작했고, 와 갖고서는 간호원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결혼해서 막 들어오고

애를 금방 뱄어요. 첫 애를 금방 배갖고 배가 남산만해져서 공부를 하는데..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데.. 딱 한번 트라이 (try, 시도)를 해봤죠. 알엔 테스트 (RN test, 공인 간호사 자격시험) .. 그거 공부를 하다가 근데 너무 힘들더라구요.”

안선희 씨는 결국 공인 간호사 자격증 공부를 포기하고 아이들 기르는 일과 가게 일을 돌보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워싱톤 시내 랑팡 플라자 전철역 인근에 있는 편의점 ‘갤러리 숍’은 안선희 씨 부부의 다섯번째 가게입니다.

//안선희 씨//

“처음에 한 가게가 세븐 데이 (seven day, 7일) 365일 하루도 쉬지않는 가게였어요. 거의 9년을 했어요. 세븐 데이를 돌아가면서, 애를 두 아이를 낳으면서 하려니깐 밤낮으로 떨어져서 해야 돼요. 애들 베이비 싯 값 (baby sit, 아이 봐주는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았고 애들 남의 손에 맡기는 것도 그래서.. 그러니까 아침에 내가 일하면 남편이 애들 데려다주고 오후에 제가 픽업하고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차 일주일에 엿새만 일하는 가게, 결국에는 일주일에 닷새만 일해도 되는 가게로 바꿔왔습니다.

//안선희 씨//

“365일 한다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맨날 밤 10시, 11시에 닫아야 되고… 학교를 가도 한 사람만 애 학교에서 뭘 하면 쫓아가야 되고, 한 사람은 가게 지켜야 되고 그런 게 많았죠. 애들이 고등학교를 가면서, 중학교를 가면서 아, 이건 아닌 것 같더라구요. 애들이 크니까는…어렸을 때는 그런 대로 한 사람만 데리고 다녀도 되는데 크면서 그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이도 들고.. 이제는 힘들어요.”

‘갤러리 숍’의 공간은 다섯평 남짓 합니다. 한 가운데 커피 판매대를 중심으로 한 쪽 벽을 따라 음료수 냉장고가 있고, 나머지 벽에는 사탕과 과자 등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습니다. 땅콩에서부터 맥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커피와 바나나, 삶은 계란이 제일 잘 팔립니다.

//안선희 씨//

바나나를 많이 팔 때는 두 박스도 팔아요. 하루에… 굉장히 많은 양이에요.

보통은 한 박스.. 과일은 후레시 (fresh, 신선)해야 되니까 매일 사요, 저희가… 저건 좀 비싸도 색깔이 변하면 못 팔아요.이쁜 거 찾느라고 어떤 때 세 군데, 네 군데를 다닌 적도 있어요. 바나나 만큼은.. 그래서 바나나는 진짜 많이 팔았어요, 저희가.. 많이 저걸 신경 써서.. 매일 사는 사람은 매일 먹어요.”

안선희 씨는 복권을 사는 손님을 제외하고도 하루에 6백명 이상이 드나든다고 말합니다.

//안선희 씨//

“큰 아이템은 하나도 없어요. 잔 손님이기 때문에 항상 사람이 들락날락 들락날락 하는데 하나도 단위가 큰 게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한 3시까지 바빠요.”

안선희 씨의 하루는 매일 아침 4시경에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메릴랜드주 락빌에 있는 집을 나서면 4시 20분, 워싱톤 시내에 있는 가게에 도착하면 오전 5시입니다. 그 때부터 부지런히 커피를 내리고 물건을 정리하면 5시 30분부터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20년이 넘도록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해왔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고 안선희 씨는 말합니다.

//안선희 씨//

“아침에 일어나는 게 참 힘들어요. 오래 됐지만도..”

오후 6시가 넘어서 문을 닫을 때까지 어디 잠시 앉아있을 틈도 없이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기 일쑤입니다. 중간중간에 들어오는 물건을 받고, 시장에 달려가서 부족한 물건을 사오고.. 또 혹시 물건을 슬쩍 집어가는 사람은 없는지, 계산이 잘못 되진 않았는지, 직원들이 돈을 빼내지는 않는지.. 현금을 다루는 사업이니 만큼 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합니다.

//안선희 씨//

“럭키면 럭키지만 강도는 안 당해 봤어요. 이 동네에서도 작년 겨울에 은행도 털리고 그랬는데.. 하여튼 돈 만지는 걸 처음부터 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을 많이 해요. 어떤 시즌 되면, 크리스마스 때 되면, 땡스기빙 (Thanksgiving, 추수감사절)때 되면 많아지니까는…”

처음 가게를 할 때는 물건을 집어가는 사람을 보면 붙잡아서 경찰을 부르고, 법정에까지 가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잘 달래서 좋게 해결하려고 합니다. 안선희 씨는 늘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충돌을 피한다고 말했습니다.

//안선희 씨//

“손님들하고는 싸우면 안되니까 돈 달라고 그러면 줘서 보내요. 뭐, 돈을 냈다, 안 냈다.. 임플로이(employ, 직원)들 올 때 마다도 저희가 꼭 그래요. 돈을 못 넣게 하고.. 캐시 레지스터에 못 넣게 하고 다 놓고, 체인지 다 준 다음에 다 끝나야 넣어요. 어떤 사람은 10불 짜리 내고 20불 냈다고 그러고 그런 게 제일 많아요.”

안선희 씨는 얼마전 딸 아이가 결혼을 하면서 마음의 짐을 크게 덜게 됐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등하교 시간이나 방과후 활동시간에 못 맞출까봐 늘 조바심을 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둘째 역시 대학에 진학한 지금, 이제1주일에 하루 쯤은 남편에게 가게를 맡기고 집에서 쉴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됐습니다. 남편 안승수 씨는 아내를 미국에 데려와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가끔은 든다고 말합니다.

//안승수//

“고생을 안 했는데, 한국에서는… 와 갖고 오자마자 일하고, 애 낳기 전까지 일하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또 지금은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고생한 만큼..”

안선희 씨가 미국에 이민 와서 생활한 지도 벌써 26년… 간호학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아있지만,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알게된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그만큼 소중합니다.

//안선희//

“농담으로 우리는 그래요. 세너터 (Senator, 상원의원) 나가도 되겠다… 어디를 가도.. 메릴랜드에서도 했고, 버지니아에서도 했고, 디씨에서도 여러 번 했고 그러니까요. 어디를 가도, 손님을 어느 곳에서도 만나요. 우리 손님이었던 사람, 그러니까 수영장에 가면, 짐 (gym, 헬스센터)에 가면 수영복 입고있는 데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요. 그 손님들이 한참 후에 보면 너무 많이 늙어졌고.. 그 사람들도 절 보면 ‘너 그렇게 어렸었는데’ 하고.. 지금은 만나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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