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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미군 57년 만에 국립묘지 안장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동료 소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한 한 미군 참전용사의 유해가 최근 워싱턴 인근에 있는 알링턴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미 육군 소속 로버트 임리 상병(Cpl. Robert K. Imrie)의 짧지만 영웅적인 삶은 생면부지의 삼촌을 찾으려는 두 여조카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져 잔잔한 감동이 되고 있습니다. 유미정 기자가 자세한 소식 전해드립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27일. 미 육군 제 2사단 38 기병연대 2 대대 에프 중대 소속으로 참전한 23살의 로버트 임리 상병은 북한 구장군 일대에서 끝도 없이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과의 사투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임리 상병이 소속한 소대는 중공군에 빼앗긴 고지탈환에 나섰고, 중공군은 기관포 사격을 가하며 이들을 좌우측에서 맹공격했습니다. 이때 임리 상병은 동료들의 보호사격을 받으며 소대 우측의 중공군을 단독 공격해 기관포 사격을 차단했습니다.

임리 상병의 동료들은 그 사이에 고지를 재탈환했지만, 임리 상병은 당시 교전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전사했습니다.

57년 전 이렇게 전사한 뒤 북한 땅에 남겨졌던 임리 상병의 유해가 지난 23일 군 의장대의 사열 속에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57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임리 상병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사, 실종미군의 신원확인을 위한 미국 정부와 생면부지의 삼촌을 찾으려는 두 여조카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임리 상병의 여조카 프란 엔더슨 씨와 앤 임리 씨는 큰 삼촌은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전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이 듣지 못하고 자랐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앤 임리 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신이 어렸을 때 삼촌 ‘바비’와 많이 닮았다고 했으며, 가족들은 삼촌이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전쟁영웅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미 공군에서 38년을 복무했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자 앤 임리 씨는 할머니 방에 걸려 있던 바비 삼촌의 사진을 고이 간직했습니다. 그러던 중 7년 전 접한 한 언론보도가 앤 임리 씨로 하여금 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앤 임리 씨는 지난 2000년, 미 국방부가 추진하고 있는 미군 전사, 실종자 가족들의 유전자 등록에 관한 언론보도를 접했다고 말했습니다. 앤 임리 씨는 이때 삼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흥미로운 기회에 참여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그렇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미군 전사, 실종자들을 이름모를 불모지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미 국방부 합동전쟁포로.실종자확인사령부,JPAC을 통해 전 세계에서 미군 유해찾기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앤 임리 씨는 유전자 대조를 위해 사용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 유전되는 특성 때문에 자신들의 유전자 표본을 제공하지는 못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결국 캐나다에 거주하는 임리 상병의 외삼촌, 빅터 르로이 털크 씨가 국방부에 유전자 표본을 제출했습니다.당시 92살의 고령이었던 털크 씨 역시 지금은 세상을 떠난 상태입니다. 이후 7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5월 앤 임리 씨에게 국방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앤 임리 씨는 삼촌의 유해 신원이 확인됐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어쩔줄 몰라 소름이 돋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당시의 감격을 전했습니다.

앤 임리 씨는 미국 정부에서 계속해서 미군 유해발굴과 신원확인 소식을 전해왔지만, 실제로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정말 기대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임리 상병의 유해는 지난 2000년 10월과 11월 사이 실시된 JPAC과 북한의 공동작업 과정에서 발굴됐습니다.

앤 임리 씨는 전화통화를 마치며 23일 거행된 삼촌의 안장식에서 느낀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삼촌의 유해를 찾는 이 긴 여정으로 자신에게는 한국과 한국전쟁에 대해 더 잘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동기가 부여됐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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