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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곽수실 씨 - 미국서 청소만 23 년 '오뚜기 인생'


미국 버지니아주 비엔나에 있는 옥튼 고등학교입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교실과 복도는 텅 비어있지만 곽수실 씨는 바쁘기만 합니다. 여름이면 한 차례씩 홍역처럼 치러야하는 대청소가 시작된 것입니다.

//곽수실 씨//

“여름에는 전체 셋업을 하니까 카펫에서부터 별 거 안 하는 게 없죠. 샴푸, 버프, 왁스, 안 하는 게 없으니까.. 의자, 걸상 모두 전체 다 닦고, 완전히 새로 딱 셋업을 해야 되니까 그래서 힘들어요.”

화장실을 청소하고, 바닥의 윤을 내고… 오후 네시부터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쉬지않고 일하다 보면 집에는 자정이 다 돼서야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허리는 끊어질 듯 하고, 종아리는 퉁퉁 부어 무겁기만 합니다.

//곽수실 씨///

“껌 씹어갖고 아무데나 뱉어갖고 그게 밟아갖고, 그거 다 떼어내야 되고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몰라. 안 해본 사람은 진짜 몰라요.

이같이 고된 청소 일을 곽수실 씨는 미국에 이민 온 후 20년이 넘도록 계속해 왔습니다.

//곽수실 씨//

“처음에 오니까 누가 공항에 오느냐 따라서 내 인생이 좌우된다고 사람들이 그러더라구… 정말 그 말이 꼭 맞아요. 내 인생이 그 때 부터 청소꾼으로 딱 그만 찍혀졌어… 청소하는 사람이 공항에 마중을 나왔어요.”

곽수실 씨는 국제결혼해 미국에 살고있던 큰 언니의 초청으로 1984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원래는 언니가 살고있던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갈 계획이었지만, 언니가 갑자기 이혼하게 되자 동생이 살고있던 로스 앤젤레스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곽수실 씨 가족은 당시 함께 이민 온 작은 언니 가족과 함께 동생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열몇 식구가 함께 사는,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창 밖으로 내다본 미국의 첫 인상은 황량하기만 했다고 곽수실 씨는 말합니다.

//곽수실 씨//

“처음에 동네 보니까 진짜 나무, 높은 나무만, 기다란 나무만 서가 있고… 진짜 쓸쓸하고.. 사람도 하나도 없고… 고요하니 무슨 귀신 나올 동네처럼.. 그래 가지고 언니보고, 언니야, 우리 괜히 왔다. 한국 살 걸…”

공항에 마중 나왔던, 청소하는 사람은 바로 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곽수실 씨 내외는 작은 언니 가족과 함께 제부를 따라다니며 청소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사는 일이 쉬울 수는 없습니다. 급기야 남자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곽수실 씨//

“싸움이 나가지고 나가라, 당장 나가라는 거야. 나 불러서 그래, 처형, 언제까지 나가세요 그래.”

무작정 운동화를 신고 나왔지만 아파트가 어디에 있는지, 사무실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곽수실 씨는 너무나 막막한 마음에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곽수실 씨//

“돈이 20불 뿐이 안 남았어요. 얼마나 큰 일 났어. 식구는 여섯 식구에다가.. 그냥 전체 다 자살하자 그랬어요. 내가 동생 집에 클리닝 (cleaning, 청소)하는 이 염산, 그런거 한 숟가락씩 먹고 죽자 그랬어요. 저 영감보고.. 우리 그만 한국에 갈 수도 없고, 여기 살 수도 없고, 길을 알어, 말을 알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 죽자, 우리 죽어버리자, 우리..”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더라고 곽수실 씨는 말합니다. 우연히 알게된 사람들의 주선으로 한인이 운영하는 청소회사에 취직이 된 것입니다. 세들어 살던 사람이 이사 나간 빈 아파트에 가서 다음에 들어올 사람을 위해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곽수실 씨 부부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일하니 첫 달에 3천 달러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곽수실 씨//

“둘이만 했나, 애들까지 동원했지. 우리 애들도 고생 많이 했어요. 뚜껑도 없는 픽업 트럭뒤에다 애들 싣고는.. 애들 데리고 가서 애들도 다 일 시켜 먹었죠. 그 큰 애 둘이만, 작은 애 둘이는 어리니까, 그러니까 걔들도 일도 억세게 시켜 먹었잖아. 가면 청소, 유리 닦아라, 샴푸, 샴푸도 거들어라, 그래 많이 했어요.”

조금씩 통장에 돈이 쌓이는 재미를 느낄 무렵, 평생 우정을 나눌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곽수실 씨//

“청소하고 쓰레기를 갖다 버리러 나가니까 어떤 아줌마하고 아저씨하고 차에서 덜컥 내리더니 ‘아줌마, 아줌마’ 그래, 그래서 딱 보니까 ‘한국 사람이죠?’ 그래. 그렇다고.. 뭐하냐고 그래, 나 보고.. 나 청소한다 그랬더니, ‘그 아파트 우리 좀 얻으면 안 될까요?’그래, ‘미국에서 누가 아파트를 마음대로 얻어요? 크레딧 있어야 주지’, 나는 조금 이제 살았다고.. ‘아파트 얻으러 다니세요?’ 했더니, ‘우리가 시애틀에서 왔는데 크레딧 없다고 집을 안 줘서 이렇게 차타고 왔다, 갔다 한다고’… 딱 내 신세야, 그 맘에 찡하면서, 기다려요, 기다려요. 내가 어떻게 보증 서가 얻어줄테니까..”

그렇게 만난 한인 부부와 곽수실 씨네는 한 가족 처럼 지내게 됩니다.

//곽수실 씨//

“우리가 얼마나 정이 그리웠잖아요. 그러다가 말 통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고마 밤낮으로 붙어 사는 거야. 그이들도 우리 일 같이 하는 거야, 같이 일당 받은 거 갖고 같이… 돈, 체크 나오면 가르면 되니까…”

곽수실 씨 가족은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가족이 다른 도시로 떠나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을 실천하게 됩니다.

//곽수실 씨//

“루이지애나 살러 가서 우릴 불렀죠. 그래서 우리가 LA에서 살다가 루이지애나로 갔죠. 뉴올리안스로… 거기 살다가 또 그이들이 이리로 와버렸어. 자꾸 오라고 막, 여기가 더 좋다고, 더 좋다고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리로 왔지. 친구 따라서 온 거에요.”

곽수실 씨는 뉴올리안스에서 도시락 배달 일을 시작했습니다. 관광지 야외 시장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서 배달하는 일이었습니다.

//곽수실 씨//

“플리마켓 (flea market, 벼룩시장) 곁에 큰 스트릿 (street, 거리)이 있어요. 그런데 그 골목에는 전체가 쥬얼리 (jewelry, 장신구)만 파는 동네거든… 그런데 그 동네 보니까 한국 사람이 굉장히 많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 날 물었죠. 우리 교인이 쥬얼리 장사 크게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내가 한국 도시락을 해서 팔고 싶은데 사 먹겠느냐… 그래서 오더 (order, 주문)를 몇 군데 받아가지고 처음에 돌리니까 네도 내도 다 갖고 오라는 거지. 앉아서 먹으니까…”

곽수실 씨는 한국에서 식당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잔치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요리하고 밤에는 건물 청소를 하는 고된 생활이었지만, 평생 처음으로 큰 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Bridge Music//

다시 친구 따라 워싱톤으로 이사온 곽수실 씨는 뉴올리안스에서 모은 돈을 밑천으로 청소회사를 차립니다.

//곽수실 씨//

“우리 셋째 사위가 빌딩을 하나 땄어요. 저희는 돈이 없으니까 나보고 돈 대고, 내가 사장하고,미국 사람 상대하는 건 지가 해주겠다, 아니, 이 놈, 돈이 조금 나오니까 바람이 딱 났네, 그것도 돈을 만지니까요 명색만 내가 사장이지, 돈은 지가 다 갖고 노니까 술집 색시하고 살림을 딱 차렸네. 이혼을 하자네, 이 놈이 어째.. 그 놈의 빌딩 때문에 딸만 이혼시켰지.”

사위가 떠난 뒤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청소회사는 파산하고 맙니다.

//곽수실 씨//

“이 놈이 가고 나니까 월급을 안 줘. 착착착착 착착 포개더니… 나는 사람들 월급 줘야지, 오피스 세, 한 달에 4천불씩 나가야지. 전기세 나가야지. 오피스는 내가 뭘 할 줄 안다고, 오피스를, 대궐 같은 오피스를 얻어가지고, 비워놓고 4천불씩 한달에 착착 물어. 2년 몇달 하니까 그 10만불이 홀랑 다 날아가 버렸어. 착착착착 포갠 월급을 그 사람들이 뱅크럽트 (bankrupt, 파산) 시켜갖고.. 돈 6백불 갖고 내가 나왔어요. 그 빌딩에서… 그리고는 쫄딱 망했잖아요.”

곽수실 씨는 이 때 받은 스트레스로 병이 났지만 언제까지나 누워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훼어팩스군 공립학교에 환경미화원으로 지원합니다.

//곽수실 씨//

“할 수 없어서 학교청소를 이력서를 냈지, 그런데 얼른 안 불러주는 거야, 또… 얼른 안 불러줘 애가 터지더라고.. 그래서 저 이가 먼저 들어갔어, 한 해에 들어갔어요. 95년에.. 그래서 학교만 들어가면 어떻게 먹고 살어? 월급도 조금 밖에 안 되는데… 한 달에 돈 1천불 밖에 안 되는데.. 그래서 가정집 청소를 시작했잖아요, 제가… LA에서 배운 청소를 그 때 써먹는 거야”

요즘에는 저녁마다 학교 청소를 계속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과 국을 조리해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접 뒷마당에서 기른 야채로 만드는 무공해 음식입니다.

이렇게 하루 두가지, 세가지씩 일을 하다보니 차츰 형편도 다시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사면서 빌린 융자금도 이제는 거의 다 갚아갑니다.

//곽수실 씨//

“애들 출가 다 시켰고, 이제 하나 남았어요. 공부 다 시켰고…나는 정신상태가 자식한테 의지 안하려고 해요. 그래서 노후보장을 탄탄하게 해놔요. 그게 보람이고, 제일 큰 보람은 자식들이 편안하게 잘 살고, 다복하게 사는 그게 제일 보람이지, 뭐..”

심장병으로 몇번씩 죽을 고비를 넘겼던 남편 박캐택 씨는 부인 곽 씨를 만난 것이 생애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박캐택 씨//

“이 양반 안 만났으면 나는 옛날에 죽었을 거에요. 지금이야 뭐, 매일 고맙죠. 지금이야 아주 참 마음도 편안하고 아주 고마워요.”

한 때는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자살할 생각까지 했던 곽수실 씨,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미국이민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곽수실 씨는 말합니다.

//곽수실 씨//

“오만 게 자유스럽잖아요. 내가 무슨 일을 해먹어도 남의 눈치 안 보고, 미국은 자기 노력한 만치 주니까… 미국은 자기만 부지런하면 다 잘 살 수 있다. 그게 좋은 거지, 미국이…”

내일 미국 미국 속으로에서는 미국내 여러 지역에 거주하는 200만명의 한인들에 관한 소식 전해 드립니다. 내일 이시간 많이 애청해 주시구요. 저는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주말 좋은 시간들 보내시기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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