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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는 블레어 영국 총리 - 10년간의 치적과 실패


영국에서 오는 27일 퇴임을 앞둔, 토니 블레어총리의 10년간의 국정운용에 얽힌 치적과 실패를 둘러싼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명암이 엇갈리는 블레어 총리의 재임중의 실적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보도를 전해드립니다.

영국의 노동당은 10여년전인 1997년 5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마가렛 대처 총리에 뒤이어 존 메이져 총리로 이어졌던 보수당의 18년간에 걸친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노동당의 당수였던 약관 43세의 토니 블레어는 1812년 리버풀경 이래 영국사상 최연소 총리로 등장했습니다.

총리 취임식에서 블레어 총리는 영국에서 새로운 여명이 동텄다고 선언하고 변혁을 기할 용기가 있다면 실제로 변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노동당은 이제 새로운 각오로 통치할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류 로버츠씨를 포함해 많은 전문가들은 블레어총리의 앞으로도 항구적인 치적의 하나는 노동당을 선거 구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정당으로 격상시킨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블레어 총리는 노동당을 중도파내지 심지어 우파로 몰고 갔다고 보는 당내부인사들이 있다고 로버츠씨는 분석합니다. 이윤은 사악하고 부자들은 괴물이고 고율의 세금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바람직하다는 노동당의 전통적인 개념을 완전히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블레어총리는 한마디로 국유화개념을 없애버렸다고 로버츠씨는 말합니다. 블레어총리는 1997년 이전 18년동안 보수당이 사유화했던 산업체들중 어떤 기업도 다시 국유화할 어떤 시도도 벌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파와 좌파사이의 이념투쟁의 여러국면에서 블레어총리는 우파로 돌아섰다고 로버츠씨는 단정합니다.

이때문에 블레어총리는 현실적으로 국가권력을 이용해 부의 재분배를 꾀하기를 원했던 노동당 본래의 핵심 수구파들로 부터 마가렛 대처 총리의 상속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로버츠씨는 분석합니다.

로버츠씨를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은 블레어 총리가 노동당을 막강한 정치조직으로 변모시킴으로써 노동당은 세차례나 총선에서 승리해 연속 집권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역대 그 어느 노동당도 해내지 못했던 중대한 치적이라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블레어총리의 10년간의 재임기간중, 영국의 국가경제는 승승장구 성장세를 이어갔고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고 지적합니다.

많은 분석가들은 영국인들은 오늘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10년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다른 치적의 하나는 북아일랜드의 평화회복입니다. 블레어총리는 상쟁파벌간의 오랜 무력파쟁을 끝내기 위해 실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북아일랜드 의회에서 캐톨릭교도들과 개신교도들사이의 군력배분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수십년간 3700명이상의 인명을 앗아갔던 상호 적대감과 폭력사태가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영국 콜체스터에 있는 에섹스대학교 영국정치학자인 앤소니 킹교수는 토니 블레어총리는 북아일랜드평화과정이 성공하기를 고대했었다고 말합니다.

1997년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집무실에 첫발을 내디뎠던 바로 그 시각부터, 블레어총리는 북 아일랜드의 평화회복을 우선 정책목표로 정했고 그 실현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블레어총리는 다른 그 어떤 다른 정책과제에 보다도 북 아일랜드문제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결국 실효를 거두었다고 킹교수는 지적합니다.

연합당의 꽤 극단적인 이안 페이즐리 당수와 에이레 공화군의 정치분파인 씬 페인의 마틴 맥기네스당수가 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타결은 실로 괄목할 만한 블레어총리의 쾌거였다고 킹교수는 말합니다.

하지만 블레어총리의 10년간의 재임기간중에는 좌절도 많았습니다. 블레어 총리 정부는 몇가지 정치추문에 휘말렸고 그중 가장 파멸적인 것은 이른바 ‘작위수여 현금’사건이었습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 측근들이 영국의회 상원에서의 귀족 작위수여등 작위수여를 대가로 노동당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수회한 혐의는 아직도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금전적 뒷거래는 영국에서 과거 수세기 동안 그치지 않아온 일이지만, 이번처럼 그렇게 공개적으로 뻔뻔히 자행된 일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토니 블레어총리의 전기물을 집필한 죤 렌톨씨는 블레어 총리는 전임통치자들과는 차별화될 것임을 약속했고 특히 윤리적 측면에서 자신은 전임자들에 비해 훨씬 높은 잣대를 갖고 있음을 내비추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작위수여 추문사건은 그러한 다짐이 위선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렌톨씨는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또 블레어 총리가 보스니아와 코소보, 시에라 레온,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등지에 영국군을 파병함으로써 다른나라들에 대해 내정간섭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다고도 풀이합니다. 많은 분석가들은 지난 10년간의 불레어총리 재임기간은 미국의 이라크침공에 대한 지원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에 대한 변치않는 지지입장으로 영구히 각인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블레어총리의 그같은 지지입장은 일각에서 ‘부시 대통령의 애완용개’라는 별명까지 나오게 했습니다.

죤 렌톨씨는 블레어총리의 그같은 어려운 문제는 미국에 대한 9.11 테러사태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날, 블레어 총리는 영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고 말했을때 블레어총리의 심경은 확고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영국인들은 그같은 블레어 총리의 발언에 환호하면서도 미국을 지원하게 될 여건에 대해서만은 유보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고 그후 관타나모 테러용의자 수감시설과 이라크의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의 수감자 학대사건을 블레어총리가 규탄하려 들지 않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로버츠씨는 지적합니다.

더구나 노동당의원들의 절반이 의회표결중에 이라크전쟁에 반대표를 던지게 되자 블레어 총리는 소속정당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속 노동당은 물론 블레어 총리는 영국국민을 상대로도 싸우게 되었다고 로버츠씨는 지적합니다. 영국인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라크전쟁은 물론이고 영국군의 이라크파병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석가들은 블레어 총리의 명성이 이라크전쟁 때문에 심오하게 손상되었고 재임 중 치적들까지 빛을 잃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들 전문가들은 또한 이라크사태가 아니었다면 블레어 총리는 아마도 계속 총리직에 유임하고 오는 2010년 5월에 치루어질 총선 때까지 노동당의 집권을 계속 이어갈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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