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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애난데일 떡집 임재순 씨 - 미국 한인들에게 고향 떡맛 찾아줘


명절이나 생일상에 빠지지 않는 우리 먹거리… 인절미, 절편, 백설기, 그리고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꿀떡… 우리 한민족은 경사가 있을 때 마다 떡을 쪄서 돌리는 것으로 기쁨을 함께 나눠 왔습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힘든 이민생활을 하던 한인들에게 떡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기 워싱톤 지역의 한인들에게 그리운 우리의 떡맛을 찾아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애난데일 떡집의 임재순 씨입니다.

“중앙장로교회에 김성덕 권사님이란 분이 계시는데 그 양반이 ‘내 환갑잔치에 일 좀 해달라’고, 청소라도 해달라고 그러더라구요. 설겆이.. 그럼, 그건 해드린다고 그래서 왔더니 저 멀리서 떡을 조그마한 솥에다 찌시더라구요. 그래서 하시나보다 하고 내 맡겨진 일 만 하고 있었죠. 그랬더니 ‘젊은 댁, 이리 와서 이 떡 좀 먹어보라’고… 전 이거 해야죠’ 그랬더니 ‘얼른 빨리 와서 먹어보고 하라’고 그래요. 그걸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어요.”

그 맛에 반한 임재순 씨는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 떡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떡을 맛있게 쪄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마른 가루를 찹쌀하고 멥쌀하고 버무려서 하면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대로 알려준 대로 했더니 안되는 거에요. 그냥 마른 가루가 나와서 안 쪄지고 안 쪄지고.. 그래서 제가 노력을 많이 했어요.”

임 씨는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맛있는 떡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그 해 12월달서부터 그걸 해보는데 여름이 되니까 그게 완전히 그래도 떡이라고 되더라구요.”

주일예배후 친교용으로 떡을 쪄가면서 교우들로부터 맛있다는 칭찬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무렵, 한 동양식품점으로부터 납품제의를 받습니다.

그 수퍼에서 새로 여는 분이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 그 양반이 떡을 대 달라고, 그게 무슨 떡이라고 대 주냐고 그랬더니, 아니라고 아줌마, 그거 해 달라고…. 그래서 그 집에 떡을 대기를…. 버지니아 애난데일에만 한 열집 수퍼마켓에다 갖다 대줬어요.”

한인이 운영하는 대형 식품점이 하나, 둘씩 들어서면서 임재순 씨가 떡을 대던 소규모 가게들은 많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함께 떡집을 내보면 어떻겠냐는 둘째 아들의 제의에 따라 15년전 버지니아주 애난데일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떡집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3년간은 하는데 애먹었어요. 그래도 아들이 같이 협조해서 해주니까, 아들이 지혜스럽게 잘 운영해 나가더라구요. 그래, 그냥 김치 하다가, 또 반찬 하고, 또 다른 국속도 모두 하자고 그래서, 이렇게 크게 하면서…”

아들 부부, 사돈댁까지 힘을 모으면서 애난데일 떡집은 어느덧 자리를 잡고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떡 뿐만이 아니라 김치, 김밥, 각종 반찬은 물론이고, 잔치음식을 주문받아 제공하는 케이터링 서비스로까지 사업을 확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워싱톤 지역의 한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여기저기 다른 떡집이 문을 열었지만 애난데일 떡집은 여전히 번창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은 언제나 변하지않는 깔끔한 맛 때문에 늘 애난데일 떡집을 찾게된다고 말합니다.

“늘 와도 한결같이 똑같은 맛이구요. 깨끗한 것 같아요. 옛날에 먹던 그런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자주 옵니다.”

임재순 씨는 방앗간집 7남매중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신앙 깊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임재순 씨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국기배례 거부문제로 퇴학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교회에서 말씀을 해주셔서 우리 학교에서, 봉일천 국민학교에서 36명이 퇴학을 받았어요. 두어달 동안 매로 살다가 결국엔 퇴학을 맞고 그렇게 해가지고 있는데 대통령하고 부통령이 오시더니, 그게 옳은 거라고, 그렇게 바꾸자고 국회에서 승인이 나가지고 그렇게 바꿨어요.”

퇴학당한 후 얼마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임재순 씨는 학업을 완전히 접게 됩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 씨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됩니다.

“아버지는 병이 드시고, 6.25 때 두 오빠가 군인 나가서, 큰 오빠는 이북으로 잡혀 갔었어요. 포로로.. 어머니는 차에 치여서 두 다리를 다 못 쓰셔서 병 간호를 다 하고.. 뭐 안 해본 거 없어요. 나중에 오라버니가 이북으로 포로당해 갔다가 다시 석방됐잖아요. 석방돼 가지고 오셔가지고 오라버니가 ‘내가 이 집의 가장이 아니라 네가 가장이다’ 그러시고 항상 저한테 모든 것을 다 의논하고 그러셨어요.”

전쟁이 끝난 후 집안일을 돕던 임재순 씨는 스물세살 나이에 남편 이영기 씨를 만나 가정을 꾸립니다. 아들 넷을 낳아 기르는 재미로 살던 중 남편이 가구제작 기능공으로 취업이민 자격을 얻으면서 1974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오게 됩니다.

“미국에 온 거는 한 33년 됐고, 저 양반은 34년 됐어요. 그러니까 둘이서 밤낮 청소하고 저 양반은 직장에 다녀와서 또 청소하고 그래서… 가정 청소도 했고, 빌딩 청소도 했고, 또 저녁에는 주로 병원 청소 했어요.”

부부가 마음을 합쳐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 1년 만에 1만 달러라는 큰 돈을 모으게 됐습니다. 임재순 씨 부부는 이 돈을 기반으로 소망하던 내 집을 갖게 됩니다. 워낙 부지런한 성격의 임재순 씨는 떡을 납품하면서도 몇 년동안은 청소 일을 계속했습니다.

“새벽에 네시, 세시쯤 돼서 떡을 해 놓고, 아침에 7시에 나가면 밤 11시나 되서 집에 돌아왔어요. 한 몇년 되다 보니까 떡에서 자리가 잡히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는 쉬고 떡만 주로 했죠.”

임재순 씨는 떡집을 하면서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맛있다는 사람들의 칭찬에 신이 나서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일하는데 김치를 열 박스 씩 그렇게 하려면, 셋이서 그렇게 하려면 힘들죠. 그 전날에 절여 놨다가 떡 하고 같이 하려면 밤 어느 때는 아홉시, 여덟시 그렇게 돼서 가요., 그 때는 좀 힘들었지만 자고 나면 또 괜찮았어요.”

떡집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임재순 씨는 6년전 둘째 아들 내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물러났습니다. 요즘은 손주들 돌보는 일에서 또다른 낙을 찾고 있다고 임 씨는 말합니다.

“추석 때 나와서 송편을 한 달간 만들어줘요. 그건 손으로 하는 것이 맛있으니까.. 한달간 해주고 또 들어가죠. 나도 이제 일흔셋이 되다가 보니까 좀 힘에 겹네요.”

달랑 1백달러 짜리 넉장을 들고 임재순 씨 가족이 미국에 이민온 지도 어느덧 33년이 됐습니다. 임 씨는 장성한 네 아들이 사회에서 각기 자리를 잡고 사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마음 가득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속 썩인거고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항상 그런다구요. ‘너희들이 엄마, 아버지 속 안 썩이고 너희들이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항상 그런다구요.”

임 씨는 아들 넷 뿐이지만 며느리들이 다들 너무 잘 해 준다며 딸 가진 사람이 부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며느리들이 앞서서 그렇게 잘해 주니까… 엊그제도 어버이 주일이라고 점심 사주고 용돈 쓰라고 돈을 주고.. ”

임재순 씨 부부는 지난해 결혼 50주년인 금혼식을 맞았습니다. 부부가 서로 마음이 맞아 열심히 일하면서 살다보니 어느덧 세월이 그렇게 흘렀노라고 임 씨는 말합니다. 남편 이영기 씨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않았던 아내가 고맙기만 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힘들어도 불평 없이 어려운 걸 극복한 게 그게 큰 자랑이죠. 맘 적으로 도와주고 저 자신이 또 여러가지로 바쁘니까 서로가 힘들게 살았죠. 여지껏… 그 힘든 보람을 느끼니까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요. 지금에 와서..”

정성이 담긴 손맛으로 낯선 땅에서 생활하는 한인들에게 고국의 그리운 떡맛을 다시 찾아준 임재순 씨, 임 씨는 이제 자신의 어메리칸 드림은 이뤄졌다며 자식들이 잘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이들 잘 살고 그런 게 소망이고 신앙생활 열심히 해줬으면 좋고.. 그런 것이 이제 엄마, 아버지의 소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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