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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 100년의 발자취] 재미 한인들의 대한인국민회,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한 몫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시는 김지수 씨를 모시고 100년이 넘는 한인들의 미주 이민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초기 한인의 생활상을 살펴 보겠습니다.

당시 본국에서 수구파와 개화파가 있었듯이 재미 한인들 사이에서도 조국에서 황실을 보존해야한다는 황실보존파, 대동보국회와 공화국이 돼야한다는 개화파, 공립협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모두가 뜻을 같이 했고 1909년에 공립협회는 국민회로 발전했고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합쳐지면서 그 명칭을 대한인국민회로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후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을 계기로 국내와 중국의 만주, 그리고 상해에서 임시 정부가 각각 세워졌는데 이들을 통합해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됩니다. 임시 정부는 외교면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고 중국, 미국, 영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과 국교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총회장 안창호를 상해 임시 정부에 국민회 대표로 파송해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는데 그 당시 한해동안 거금의 자금을 거두어들여 미주한인들도 임시정부 창설에 한몫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 당시 국민회 중앙 총회장인 도산 안창호를 상해에 파견하게 됐습니다. 상해에 파견할 때 1919년 3월 부터 같은 해 12월 까지 1년 동안 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무려 8만 8천불을 모금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안창호 선생이 2만 5천불을 가지고 상해로 갔습니다. 상해로 가서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그 돈으로 상해 임시 정부 건물도 임대하고 내각 구성을 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게됩니다."

1919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는 구미위원부가 형성되는데 구미 위원부는 이승만이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한국 위원회를 개편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구미 각지에서 시행할 정부 행정을 대행하는 기관으로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 뒤 외교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해 유럽과 미주에서의 외교 업무를 장악했습니다.

이승만 김규식등은 당시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그룻된 한국인식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한국 문제를 미국 국회에 상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체결때 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미국에서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적극 활동한 많은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것이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하와이에서는 합성협회, 이들 모든 단체가 합쳐져 대한인국민회가 됐고 국민회 산하에는 대한여자애국단이 있어서 이들도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도왔고 구미위원회, 흥사단, 동지회, 한족연합위원회 등이 재미한인들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가 됐습니다."

다음 주에는 미주한인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샌프란시스코 즉 상항한인감리교회에 관한 얘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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