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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 = 3300ff>[나의 삶, 나의 보람]</font> 박정희씨 - 워싱톤 지역 한인 미용실 개척자


좀 더 아름답게.. 좀 더 세련되게…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소망입니다. 여기 그같은 여성의 꿈을 가꿔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용인 박정희 씨.. 버지니아주의 한인타운 애난데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씨가 이 곳에서 미용실을 처음 연 것은 지금으로부터17년전.. 아직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드물 때였습니다. 당시 영어가 서툰 한인들은 미국인 미용사에게 원하는 머리 모양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곤란을 겪는 일이 많았습니다.

박정희 씨는 솜씨있는 한인 미용인을 원하던 많은 한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워싱톤 지역 한인 미용실의 개척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박정희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일찍부터 직업전선에 나서게 됐습니다. 아직은 친구들과 수다 떨며 노는 것에 관심이 더 많은 나이였지만 혼자 된 어머니가 6남매를 돌보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열네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위로 오빠 한 분 계시고 그 다음에 저, 동생 넷, 엄마는 너무 젊을 때 혼자가 되셨죠. 엄마가 우리 키우느라 너무 애를 썼기 때문에 엄마를 빨리 도와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친구의 권유로 미용학원에 다니게 됩니다.

“제가 미용을 시작한 거는 27년전이구요. 그러니까 19살 때부터 시작을 했지요. 그런데 그 시절에는 직업도 많지 않았고 우리가 자랄 때 도시를 제외하고는 시골에서는 어려운 시절이었죠.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서 취직을 했지만 너무나 미흡한 주급이었고, 월급이었고, 그래서 미용을 하는 친구를 따라서 친구 권유에 의해서 미용학원에 다녔고 그렇게 해서 시작을 했습니다.”

박정희 씨는 어렸을 때 부터 모양 내는데 유달리 관심이 많았습니다.

“머리를 묶어도 좀 특이하게 묶었고 옷을 입어도 특이한 걸 좋아했어요.”

어려서부터 미적 감각이 있었던 탓인지 곧 미용에서도 소질을 드러냈습니다. 3개월 속성 미용학원을 수료한 뒤 처음 일자리를 얻은 곳이 조선호텔 미용실.. 외국인 손님이 많이 드나들던 조선호텔 미용실은 그야말로 별세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일단 시설에 놀랐고 그런 미용실을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런데 특이한 건 외국사람이 드나들었다는 것…그래서 이 세상을 알기 시작했죠. 청소하고 보조일부터 시작하고, 샴푸 시작하고.. 그 시절에는 그 시다라는 과정이 굉장히 길었어요. 다행히 운이 좋아서 그렇게 오랜 기간을 거치지않고.. 내가 좋아도 했었지만 열심히 했었고.. 그래서 빨리빨리 컸던 것 같아요.”

박정희 씨는 생전 처음 미국인 손님의 머리를 감기다가 손님의 옷을 적시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크게 야단을 맞을 걸로 생각했지만 미국인 손님은 언짢은 기색 없이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박 씨를 위로했습니다. 박정희 씨는 당시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미국인에게 감동을 받았다면서 그 때 부터 외국에 나가고 싶은 꿈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조선호텔에서 처음 일을 하면서, 그 친절한 미국인을 보면서 그리고 또 나의 모든 환경과 백그라운드를 보면서 미국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고…”

보조기간을 마치고 이대입구에서 미용사 데뷔를 한 박 씨는 곧 솜씨를 인정 받아 당시 멋과 유행의 중심지였던 명동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이민수속 중이던 남편을 만나 18년전 미국 땅을 밟게 됩니다.

당시 워싱톤 지역에는 영업허가 없이 가정집에서 머리를 해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운영하는 한인 미용실은 없었다고 박정희 씨는 말합니다. 박정희 씨 역시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의 머리를 집에서 해주며 미용실 개업준비를 했지만 그 과정이 쉽지 만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3년 이상 경력이 있으면 인정을 해줘요. 그렇지만 시험은 봐야되죠. 실기는 인정을 해줘요. 아시안들 솜씨가 좋은 걸 미국 사람들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시험을 보게 됐는데 굉장히 쉽지 않았었죠. 영어도 힘들었었고.. 그 시절에는 트랜슬레이터 (통역) 해주는게 통했었었요. 그래서 그 과정을 거쳐서 라이센스 (면허)를 갖게 됐죠.”

박정희 씨는 미국에 이민온 후 1년여 만에 버지니아주 애난데일에 미용실을 엽니다. 당시 애난데일은 한인 업소들이 한두개씩 늘어나면서 한인타운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박정희 미용실은 문을 열자마자 많은 한인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그리워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명동에서 일을 했던 게 도움이 됐었고 그래서 일도 열심히 했었고.. 손님들을 끌기에는 너무나 쉬웠던 것 같아요. 시작과 동시에 굉장한 호황을 누렸고 지금까지도.. 너무 감사하죠.”

박정희 미용실의 단골 손님들 가운데는 멀리 메릴랜드주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려서 엄마 손에 이끌려 오던 아이들이 어느새 결혼을 해 아이를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버지니아주 로튼에 거주하는 김영미 씨도 박정희 미용실의 단골입니다. 김영미 씨는 친구가 머리를 예쁘게 하고 나온 걸 보고 마음에 들어 소개를 받고 찾아오게 됐다며 5년째 변함 없이 박정희 미용실을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원장님이 특별히 컷팅을 예쁘게 잘 하시고 스타일리시하게 잘 해주셔서 언제나 와도 만족스러워요. 전에 다니던 미용실 여러 군데가 있었지만 늘 제가 원하는 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여기 와서는 항상 만족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씨는 손님들의 넘치는 사랑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박정희 씨는 항상 유행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늘 그걸 좋아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헤어쇼도 많이 가구요.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여행을 많이 해요. 유명한 미국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 파리나 이태리나 스페인이나 일본이나 중국 같은데.. 세계의 패션이 어떤가, 그리고 유행이 어떤가.. 스타일이 어떤가.. 그래서 항상 중점을 유행하고 멋에 발란스를 맞추죠.”

미용실이 나날이 번창한 것과는 달리 가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민 온 뒤 기술이 있던 박 씨가 먼저 미용실을 열 때는 남편의 외조가 한 몫을 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씨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서도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며 남편을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남편이 저보다 낫기를 더 바랬어요. 제가 미용을 하면서

부부간의 발란스 맞추기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 내가 능력이 있지만 이렇게 나가면 결혼생활이 어려울 것 같아서 남편 쪽으로 밀었죠.”

박정희 씨의 남편은 일본식 철판구이집을 열었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 때도 제 바램은 경험이 좀 있었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여자 말 잘 안 듣잖아요. 남자들이.. 그거 시작을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잘 되지않았어요. 그래서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부부관계도 쉽지 않았었고..”

부부라면 한번씩 거치는 일종의 권태기였는지, 부부생활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던 중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순간에 나한테 남아있는 게 뭔가 생각했을 때 사랑하는 아들하고 딸이 있었어요. 자식들 때문에 살아야 된다는, 살았다는 옛 어른들 말씀이 정말 맞구나 싶으면서 지금 돌아보면 한숨이 나오는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잘 견뎌왔던 것 같아요.”

박정희 씨는 한 때는 지점을 내거나 프랜차이즈를 세우는 등 사업을 확장할 계획도 가졌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접었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들이죠. 제 힘이고, 희망이고.. 그러나 저는 자식도 중요하지만 남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이들이 그 사랑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제 직업을 사랑하고 제 비지니스를 좋아하지만 제 가정이, 제 남편, 아이들이 첫째입니다.”

박정희 씨는 그러나 새로 미국에 오는 젊은 미용인들은 주류사회에 진출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좁은 한국시장에서 서로 경쟁하고 힘들어 하는 것 보다는 미국 시장은 무궁무진하거든요. 그리고 우리 아시안들, 특히 한국인들 너무나 센스 있고 솜씨들이 좋은데 정말 안타깝고 아까워요. 영어를 배우고 미국 미용실에서 일을 시작하라는 거, 그건 정말 당부하고 싶어요. 후배들한테..”

본인 자신은 미국 주류사회에 나가지 못했지만 박정희 씨는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변함없이 찾아주는 단골 손님들, 그리고 늘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미용실에 들어서는 박정희 씨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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