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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정신장애에 시달린 조승희의 성장배경


미국을 충격 속에 몰아 넣은 버지니아 공과대학 총기 난사 사건 이후 1주일이 지난 지금, 정신장애와 그에 따른 극심한 고립 속에 살아온 범인 조승희 씨의 성장배경이 범행의 근본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조 씨의 미국 도착부터 범행 전까지의 삶을 되짚어 봤습니다.

1992년 9월 또 하나의 아메리칸 드림, 즉 미국에서의 성공 신화를 꿈꾸며 한국의 한 가정이 디트로이트 땅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조성태 씨와 부인 김향인 씨! 그리고 그들의 양 손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 저곳을 쳐다보는 활달하고 똑똑한 딸 선경 양과 늘 무표정한 채 혼자 놀기만을 좋아하는 8살의 아들 승희 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벌이가 시원치 않은 중고책 서점을 운영하며 빡빡한 생활을 하던 조성태 씨 가족! 그들이 창동의 지하 전세방을 떠나 친척이 살고 있는 미국행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한국인 이민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 씨 가족의 미국생활은 시작부터 조금씩 삐걱거렸습니다. 말 수가 적고 부모의 질문에도 반응이 거의 없어 걱정했던 아들 승희가 자폐증이 있다는 진단을 병원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폐증은 사람을 대하는 것을 기피하고 자기의 세계에 집중돼 있어 사회활동과 의사소통이 힘든 정신발달 장애의 하나로 환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 증상을 보입니다.

하지만 유교적 문화에 젖은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그렇듯이 조 씨 부모는 아들의 병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승희 씨의 증세가 일반학교 수업이 불가능한 전형적인 자폐증 아이들 처럼 심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부도 잘해 조 씨 부부는 희망을 갖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아버지 조성태 씨는 주 6일 하루 12시간씩 세탁소에서 일하며 손님들의 바지를 다렸고, 어머니 향인 씨도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한 대가로 조 씨 가족은 5년 뒤인 1997년 워싱턴에서 서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센터빌시에 타운하우스, 즉 연립주택 한 채를 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딸 선경 씨가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가운데 한 곳인 프린스턴대학에 합격해 기쁨은 두 배가 됩니다. 평소 조용하고 성실한 성격의 조성태 씨이지만 딸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색이 바뀌며 자랑하기에 바빴다고 주위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빛이 더할수록 조 씨 가정에는 그림자도 더욱 짙어져 갔습니다. 딸 선경 씨가 그들에게 빛이었다면 아들 승희 씨는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기 힘든 조 씨 부부의 그림자였습니다.

새로운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한 딸과 달리 아들 승희 군은 한국에서 보다 더 고립돼 갔습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영어를 구사하는 같은 반 친구들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고, 키가 한뼘 정도나 더 커진 중학교 시절에는 동급생들의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럴수록 승희 군의 입은 더욱 굳게 잠긴 자물쇠가 돼 갔습니다.

그와 중학교를 함께 다녔던 제임스 더피 군은 NBC 텔레비전에 보낸 조 씨의 동영상을 통해서 그가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부 동창생들은 그가 말을 했느냐 여부를 놓고 내기를 걸 정도로 조 씨는 침묵의 외톨이였다고 회상합니다.

콜림비아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자폐증 전문가 쥬디 홍 씨는 자폐증세가 있는 많은 어린이들의 경우 대개 누군가가 자신의 세계를 침범하거나 불편하게 할 경우 보통사람 보다 매우 쉽게 분노를 발산한다고 말합니다.

홍 씨는 자폐증 환자 중 일부는 상대를 꼬집거나 물기도 하고 괴성을 지르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 때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평소 조용하던 조승희 군이 어릴 때 누나와 다툴 때면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는 조 군이 때때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폐증에 따른 참기 힘든 분노, 그리고 폭력적 성향이 그 안에 내재돼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는 아들을 염려한 어머니 향인 씨는 의사의 권유대로 미술 등 특수치료를 받기도 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게 해주려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주위사람들은 말합니다.

수 년 전 이들과 함께 교회에 다녔던 장모 씨는 조 씨에 대해 이렇게 회상합니다.

“ 항상 볼 때 마다 말도 없었고 표정도 없었고, 그렇지만 그 아이가 공격적이라든가 그런 면은 전혀 보지를 않았고 그냥 착해보이고 순수해보였는데 어떻게..믿어지지 않드라구요. 텔레비전에 나온 모습이 너무도 변한 모습이라서요.”

어머니 조 씨는 교회를 여러 번 옮겨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렇지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교회 중고등부 안에서도 아들이 일부 철없는 학생들로부터 놀림거리가 됐기 때문입니다.

조 씨가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공과대학에 입학하자 부모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조 씨 부부는 가족과 처음으로 떨어져 홀로 살아가야 하는 외톨이 아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조 씨와 대학 기숙사 같은 방에서 생활했던 중국계 친구는 조 씨 부모와 누나가 그런 이유 때문에 조 씨에 대해 염려하며 몇 번이나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조 씨는 부모 등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환경에서 해방된 분출구를 오히려 자신의 세계를 더욱 요새화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의 외형은 늘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 처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의 일부 교수는 그를 깡패로 취급했고, 일부는 손을 내밀며 도와주려 했지만 조승희 씨는 이미 모두와 벽을 쌓은 상태였습니다. 그와 4학년 영어수업을 들었던 한인 1.5세 김명현 씨는 조승희 씨가 말수가 거의 없고 사람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이름 말한 것 빼고는 제 기억 속에 한 번도 수업시간에 말한 적이 없어요. 교수님이 장난으로 질문을 해도 말을 안할 정도니까요. 제가 눈을 기억하는데 계속 밑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고.”

2007년 4월16일 버지니아 공과대학 영어학과 4학년 조승희 씨는 미국 역사에 오욕으로 남을 최대의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지릅니다.

아직 구체적인 범행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 씨의 범행에는 분명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자기의 정신세계를 방해하는 것들에 극도로 쉽게 분노하는 자폐증 증세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랜 고립 속에 세상에 처음 드러낸 그의 손짓이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SOS가 아닌 분노와 끔찍한 폭력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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