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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 = 3300ff>[나의 삶, 나의 보람]</font> 오천익 씨 - 접시 닦으려 두드린 문, 프랑스 요리 40년의 길을 열다


워싱톤 디씨 교외에 있는 버지니아주 그레이트 폴스, 경사가 심한 이 곳 언덕길을 달리다 보면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아담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흰색 페인트칠을 한 외벽에 붉은 덧창이 달려있는 이 곳은 바로 ‘로베르즈 쉐 프랑소와 (L’auberge Chez Francois)’, 5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입니다.

주인의 이름을 따 ‘프랑소아네 여인숙’이라고 불리우는 이 식당은 몇십년 동안 워싱톤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워싱토니안들 사이에서 보통 ‘쉐 프랑소와 (Chez Francois)’라고 알려져 있는 이 식당은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같이 아주 특별한 날에나 찾는 곳입니다.

은은한 촛불 아래서 버터에 살짝 볶은 거위 간 요리, 프로방스 식 향초로 양념한 어린 양고기, 구운 바닷가재와 사슴 고기 등 전통 알사스식 프랑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이 식당의 주방장이 한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올해 예순아홉살인 오천익 씨, ‘쉐 프랑소와’에서 일한 지 벌써 40년이 됐습니다. 지난 1967년에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온 뒤 처음 취직한 직장에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천익 씨는 미국을 여행하던 중 여비가 바닥 나자 접시닦이로라도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에 당시 워싱톤 디씨 시내 안에 있던 ‘쉐 프랑소와’의 문을 두드렸다고 말합니다.

“그 때 미국에 첨 올 때는 여행비자로 와서 정 안되면 좀 돌다가 한국 가려고 생각한 건데 마침 돈은 다 떨어지고 하니까 무슨 잡(직업)을 가져야 겠어서 무슨 식당에 들어가서 그릇 닦자고 얘기를 하죠. 미국 온 한국 유학생들도 다 시작하는 게 식당 그릇닦이라고 해서 그래서 나도 간 건에요.”

접시닦이로 일하겠다면서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타난 동양 청년을 주인 프랑소와 해린저 씨는 눈여겨 보게 됩니다. 프랑소와 씨는 프랑스 요리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오천익 씨에게 자신의 요리 기술을 모두 전수해 주겠다며 접시닦이가 아니라 요리사로 고용합니다. 프랑소와 씨는 첫 눈에 오천익 씨가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걸 알아봤다고 말합니다.

프랑소와 씨는 보자마자 오 씨가 맘에 들었다며 본능적으로 요리를 잘 할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오천익 씨는 외국으로 나오기 전 서울 소공동에서 조그만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됩니다. 당시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유학을 가거나 서독의 광부로 나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한국사회가 너무 어려웠을 때고 64년도니까 그때는.. 어떻게든지 외국에 나가서 외화를 벌어들이는게 낫지않을까.. 그 때 마침 그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나가보자.. 외국 나가는 길이 그 때는 딱 하나 밖에 없었어요.”

일단 외국바람이 든 오 씨는 광부 취업시험에 합격한 뒤 서독으로 떠납니다.

서독에서의 광부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습니다. 고용주는 쉽고 편한 일은 현지인들에게 맡기고 어렵고 위험한 일은 오 씨와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시켰습니다.

몇 번이나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약속된 계약기간을 채우지 않으면 비행기표를 물어내야 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어두운 탄광 속에서 버텨냈습니다.

“글쎄 뭐,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힘들었지만 이왕 독일에 갔으면 끝까지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냥 참고 한 거고… 독일에 갈 때 여비를 광산에서 대준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 물어야 돼요. 아니면 재정봐준 사람이 물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구요. 그 때는..”

마침내 약속한 계약기간 3년을 채운 오천익 씨는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1967년 어렵게 미국 관광비자를 얻어 미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워싱톤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이 바로 ‘쉐 프랑소와’였습니다.

오천익 씨는 ‘쉐 프랑소와’에 요리사로 취직하면서 자신이 요리에 재주가 있는지, 관심이 있는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단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프랑소와 씨가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배웠고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었습니다. 40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적성에도 맞는 일이었나 보다고 오 씨는 말합니다.

같은 직장에서 40년을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천익 씨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이민물결이 일면서 대거 미국에 온 한인들이 장사로 많은 돈을 벌어 큰 집을 사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초라하게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 성실히 일을 했고 딸 셋을 어엿한 전문인으로 키워낸 지금은 결코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별 보고 갔다 별 보고 오는 거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은 부부가 다 뛰어야 되는 거고 우리는 그래도 나 혼자만 일을 하면 부부가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집 사람은 애들 학교 보내고, 그래서 지금은 애들이 잘 됐다고 생각해요. 남들 보다는..”

오천익 씨의 딸 셋은 모두 미국의 명문 대학으로 꼽히는 버지니아 주립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큰 딸은 현재 남편과 함께 부부 의사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 딸은 변호사로, 그리고 막내 딸은 워싱톤 인근 알링톤 군에서 공립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천익 씨는 부인 오순선 씨를 신문에서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소포를 보내면서 포장지 대신에 싼 신문지를 살피다가 신문에 난 글을 읽고 글쓴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인연이 돼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냥 그 때 첨에 와서 한국 사람도 없고 만날 기회도 없으니까 그냥 신문을 읽다 보니까 그 때 무슨 동아일보 여성코너라는 난이 하나 있었는데 이상한 기사가 나와서 이건 믿을 수 없는 기사다 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그 때는 정말 일 갔다오면 혼자 집에 있구 자고 일어나면 또 일 가고 그러니까 심심하니까 편지 한번 써봤어요. 그랬더니 그게 답장이 오네요.”

부인 오순선 씨는 난데 없이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와 당황했었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선물이 뒤바뀐 거 그걸 무슨 컬럼을 쓴 거 같은데 우리 남편이 편지 보내길 스토리가 너무 가짜같다는 등, 너무 지어서 했다는 등 그런 식으로 글을 쓴 거에 대해서 품평을 해서 편지를 보냈더라구요. 참 미국까지 갔으면 보통 사람 아닐텐데 어떻게 그런 걸 보고 반박을 했나 하고 할 일 이 없어서 그랬냐고 편지를 써서 보냈죠.”

그렇게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이 인연이 돼서 두 사람은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부인 오순선 씨는 낯선 땅 미국으로 선뜻 시집 오기가 쉽지 않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오 씨의 솔직함에 마음이 끌렸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솔직하게 자기 현실을 하나 가식도 없이 미국에 와가지고 지금 식당에서 일한다, 그런데 자기는 마음이 좋다. 마음이 넓고 그러니까 자기가 이해를 많이 하겠다, 자기는 건강해서 자기가 다 테이크 케어 하겠다…지금도 편지가 다 있어요.. 그 때 주고받은 편지들이..”

오 씨는 현재 ‘쉐 프랑소와’의 주방장으로서 주방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음식 재료를 주문하고 준비상태를 점검하는 일에서부터 30명에 이르는 요리사와 보조인들의 근무시간까지 모든 일을 관리합니다. 주인 프랑소와 씨는 여든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쉐 프랑소와’의 수석 조리장 직함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주방의 모든 일은 오 씨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천익 씨는 40년을 일하면서 한번도 아프다고 꾀병을 부린 적이 없습니다. 또한 ‘쉐 프랑소와’식당을 직장으로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식당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재료를 구입할 때도 가장 신선한 재료를 가장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기 위해 애쓴다고 말합니다.

“이걸 내가 내 장사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가격을 먼저 생각해요. 같은 물건인데 보는 거에요. 얼마씩 받나, 그래서 싼 걸 들여오고 그런 걸 신경 많이 써요. 또 그런 걸 알아주니까 있는 거구요.”

오천익 씨와 주인 프랑소와 씨는 40년 세월을 함께 하면서 고용주와 고용인 이상의 관계가 됐습니다. 프랑소와 씨는 오 씨를 가리켜 친 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프랑소와 씨는 오 씨가 신사라며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재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 값싼 재료를 찾는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오천익 씨는 말합니다. 오 씨는 미국인 고객들은 한인과는 달라서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금방 편지가 온다고 말합니다.

“한국 분들은 가서 맛 없으면 안 가버리지만 미국 사람들은 맛 없으면 그 다음날 금방 편지가 와요. 내가 몇일날 몇일날 가서 먹었는데 뭐가 맛이 없었다…그런 거 굉장히 신경 써져요. 무슨 물건이 상했나 안 상했나..”

오천익 씨는 40년 요리 인생을 돌아보면서 처음에 왔을 때는 그저 그런 식당에 불과했던 ‘쉐 프랑소와’가 워싱톤 지역에서 알아주는 일류 식당으로 발전한데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 식당이 옛날엔, 30년전엔 그렇게 유명한 식당이 아니었어요. 주인하고 나하고 항상 그래요. 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거다. 그래 보람을 느끼고…”

오랜 세월을 지키다 보니 워싱톤 지역 손님들의 생활방식이 바뀌는 것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9시 이후 늦은 저녁식사를 선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6시경에 이른 저녁을 먹고 빨리 잠자리에 들길 바라는 것 같다고 오 씨는 말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쉐 프랑소와’의 음식 맛입니다. 식당은 주인이나 주방장이 바뀔 때 마다 맛이 바뀌기 쉬운데 ‘쉐 프랑소와’는 프랑소와 씨와 오천익 씨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오는 손님도 안심하고 기억 속의 바로 그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천익 씨는 한 때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은퇴할 때 까지 ‘쉐 프랑소와’를 지킬 생각입니다. 다른 한인 이민자들처럼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진 못했을지 몰라도 한 곳에서 40년을 성실하게 일해 온 오 씨의 인생은 그의 몸에 배어있는 프랑스 요리 냄새 만큼이나 풍요롭습니다.

나의삶, 나의보람 오늘은40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오천익 씨의 얘기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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