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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 = 3300ff>[나의 삶, 나의 보람]</font> 이승복씨 - 사지마비 장애인으로 미국 최고의 의사가 되다


미국 동부의 항구도시 볼티모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과 병원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의 존스 홉킨스 병원 산하 재활병원인 케네디 크리거 인스티튜트 (Kennedy Krieger Institute) 에 가면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누비는 특별한 의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수퍼맨 닥터 이승복 씨, 미국에 몇 안되는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가운데 한 명입니다. 휠체어, 즉 바퀴의자와 보조기구를 사용할 뿐, 이승복 씨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의사나 다름없이 환자를 진료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그렇 듯이 이승복 씨도 처음부터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들 보다 건강했고 운동실력도 뛰어났습니다.

이승복 씨는 고등학교 시절 체조선수로 활약하면서 88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올림픽 꿈나무였습니다. 이승복 씨는 한국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넉넉한 생활을 하던 부모님이 미국에 이민 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체조선수의 꿈을 키우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모로 힘들었어요. 낯선 땅 미국이란 나라에 와가지고 생활 관련된 것도 그렇고, 부모님 직업도 그렇고 부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았어요. 제가 어린 나이 때 부터 장남으로서 어떻게 뭘 하면 가족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는 도중에 체조를 하게 됐어요.”

이승복 씨 가족이 미국에 이민 와 처음 정착한 곳은 뉴욕의 플러싱, 가난한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빈민가였습니다. 이승복 씨 부모는 그 곳에서 다른 많인 한인들처럼 가게를 열었지만 물건을 도둑맞거나 강도를 당하기 일쑤였고 또 믿었던 친구한테 돈을 뜯기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다니던 교회 인근 YMCA 체육관에서 또래 청년들이 체조를 하는 모습을 본 이승복 씨는 체조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리고 미국 선수가 아닌 대한민국 체조 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 날을 꿈꾸게 됩니다.

“체조 시작할 때 부터 아주 그냥 큰 꿈을 갖고 이 다음에 나도 올림픽에 나오는 선수들 처럼 우리 나라 대한민국 대표로서 금메달리스트가 돼서 진짜 우리 나라를 미국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무엇보다도 부모님들한테 자랑스러운 장남이 될 것이다 그런 꿈을 갖게 돼서 체조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열심히 흘린 땀방울의 대가로 이 씨의 기량은 나날이 향상돼 1982년 전미 챔피언쉽 대회에서는 마루와 도마 부문에서 각각 1등을 하고 종합 순위 3등이란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체조 명문인 웨스트 포인트 미 육군 사관학교와 스탠포드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로부터 체조 장학생 제안을 받는 등 앞 길이 창창해 보이던 어느 날 금메달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코치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동작에 도전하다가 균형을 잃고 턱부터 마루에 떨어지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연습하는 도중에 하루 실수를 해가지고 떨어져서 척추신경을 다치게 된 것 같아요. 여러 모로 힘들었었고 진짜 과연 내가 운동선수로서 성공을 해서 올림픽까지 나가서 금메달까지 딸 수 있을까 그런 것도 불안하고 컨디션도 안 좋았었고 다친 데도 많았고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이승복 씨는 이날 사고로 7번 경추를 다쳐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습니다. 허공으로 솟구치며 날렵한 공중회전 묘기를 보여줬던 이승복 씨의 몸은 평생 휠체어에 묶이게 됐고 힘차게 철봉을 움켜줬던 손가락은 제대로 연필조차 쥘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해졌습니다.

사고 직후 이승복 씨는 사지마비가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공중을 훨훨 날아다녔던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옆으로 돌아 눕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 그 때 힘들었어요. 아주 많이.. 많이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런 고통을 당하고 또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인생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을… 그 때도 사실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이승복 씨는 마음 먹고 용기를 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열심히 재활에 힘쓰게 됩니다. 자신의 증상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책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때 였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 그냥 그런 호김심이 생기더라구요. 내가 왜 이렇게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왜 이런지 그게 막 호기심이 나고…”

이승복 씨는 체조에 쏟았던 열정으로 재활훈련과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이승복 씨는 오래 앉아서 공부하기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미국 뉴욕 대학교에 장애인 특별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뉴욕대 졸업후 바로 의대에 진학할 생각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공중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승복 씨는 결국 여러 의대에 서류를 넣은 결과 명문 아이비 리그의 다트머스 의대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습니다. 다트머스 의대 2백여년 역사상 최초의 사지마비 장애인 학생이 된 것입니다.

정상인에게도 버겁다는 의대 생활은 이승복 씨에게 있어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자 제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다트머스 의대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받아들였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승복 씨는 계단 옆에 휠체어를 위한 경사로를 설치해줄 것과 장애인을 위한 수술도구를 준비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의대 다닐 때가 아주 힘들었죠. 당연히… 아주 오래된 학교라서.. 시골 산꼭대기에 있는 아이비 리그 캠퍼스 가운데 또 의대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동안.. 특히 또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눈 올 때 마다 자주 강의도 못 가는 날이 많았었고…”

하지만 여러 교수들과 동료 학생들의 따뜻한 도움을 받으면서 이승복 씨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보스톤 하버드 의대에서 인턴과정을 거친 뒤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내려와 전공의 과정을 마친 이승복 씨는 지금은 어엿한 재활의학과 전문의로서 케네디 크리거 인스티튜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승복 씨가 장애인이란 이유로 의사로서의 능력을 의심하는 환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환자들은 몸이 성한 정상인 의사 보다는 자신들과 같이 몸이 불편한 이승복 씨에게 더 마음을 열고 의지합니다. 자동차 사고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트라비스 벡커 씨는 이승복 씨와는 대화하기가 쉽다고 말합니다.

벡커 씨는 이승복 씨가 훌륭한 의사라면서 특히 척수부상 환자들은 같은 경험을 가진 이승복 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년 전 중풍으로 왼쪽 몸이 마비된 어머니 정보숙 씨 역시 이승복 씨의 환자입니다. 정보숙 씨는 지난 2000년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역이민했지만 자주 미국의 아들 집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승복 씨와 마찬가지로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정보숙 씨는 아들이 겪었을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 새끼가 이렇게 된 거 생각해보면 젊은 애가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었을까 참 마음이 아팠었어요. 한편으론 대견하지도 했지만 가엾기 짝이 없었지요.”

손바닥에 돌처럼 딱딱한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열심히 휠체어를 굴리며 살아온 이승복 씨도 이제는 한발짝 물러서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셨지만 집에 돌아가 홀로 어두운 방의 불을 켜야하는 일은 더이상 없습니다. 먼저 불을 밝히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승복 씨는 지난 1월 고려대학교 국제어학원 강사였던 김양원 씨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두 사람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대학생들의 선교활동 모임에서 처음 만났지만 서로 안면을 익혔을 뿐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17년 뒤인 지난 2005년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가 인연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운명이구나, 이제.. 진짜 하나님 뜻인 것 같다 싶어서… 지난 2년 동안 자주 한국을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나갈 때 마다 여러 사람 만나서 식사할 때도 같이 따라오고 그래서.. 단 둘이서 이렇게 데이트하고 뭐 그런 개인 시간은 많이 못 보내게 됐어요. 그게 좀 아쉽긴 하지만.. 이제 결혼을 했으니까 매일매일 데이트 하는 식으로 같이 자주 시간을 보내고..”

사지마비 장애인이면서 미국 최고의 병원 의사로 우뚝 선 수퍼맨 닥터 이승복 씨,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실현해 낸 이승복 씨는 비록 체조 선수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지만 신체장애를 딛고 일어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금메달리스트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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