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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씨 이야기


이 곳은 미국에서 고급 유기농 식품 판매로 유명한 켄터키주의 한 수퍼마켓 체인점입니다.

깨끗하게 진열된 수 많은 식료품 판매대 뒤로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 미국인 직원들 사이에 한 동양 청년이 눈에 띕니다.

아직 얼굴에 장난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대 초반의 이 어린 청년은 지난해 7월 중국 선양주재 미국 영사관을 통해 미 대륙에 입국한 탈북자 찰리씨입니다.

찰리씨는 이 곳에서 요즘 건강식품으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생선초밥(스시)과 캘리포니아롤 등 일식 도시락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스시는 지금은 이렇게 잘 못하지만 한 두달 하면 아마 이쁘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것은 자신 있어요. 지금도.”

찰리씨는 미국 정착 초기부터 시내 일식 식당에서 스시맨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두 달전부터 이 곳 수퍼마켓에 정식 일자리를 구해 하루 두 직장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찰리씨가 태평양을 건너 이 도시에 정착하기 까지는 참 많은 우여곡절과 생명을 건 모험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머문지 4년째인 지난 2005년 가을, 찰리씨는 한국행을 결심하고 브로커를 통해 대련의 한국국제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에서는 마음 놓고 못살지 않습니까? 한국가면 시민권 갖고 자유롭게 살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행을 택했어요)”

찰리씨는 이후 선양주재 한국 영사관으로 보내져 영사관 건물 지하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다른 탈북자들과 8개월을 보냈습니다.

“대우도 너무 잘해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거기 안에서 보내는 생활이 정신적으로 미치겠는거예요. (한국 영사관 관계자들이)책도 갖다주고 텔레비젼도 보여주고 컴퓨터도 있고 탁구대도 있었어요. 그런데 보던 사람 또 보구 하는 말 또 하고 처음에는 새롭게 만나 할말도 많았는데 그것도 한 두 달이지…”

한국 영사관에 대기중인 탈북자들은 평균 1년정도의 대기 기간을 거쳐 한국으로 갑니다. 중국 정부가 괘씸죄(?)를 적용해 출국 허가서를 일찍 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사관에서 언제가 될지 모를 한국행 허가서를 기다리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지난해 5월, 찰리씨와 다른 탈북자들은 휴게실 텔레비젼에서 방영되는 한국 뉴스를 통해 제 3국의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미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게됩니다.

“TV 에서 6명이 미국에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아…탈북자들을 미국에서 받아주는구나! 그럼 우리도 가자! 하구…”

찰리씨와 탈북자들은 뉴스 내용을 대충 듣고 미국이 세계 일류급 부자나라이니까 한국보다 더 잘해줄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 5월 17일 밤 마음이 통한 다른 탈북자 3명과 함께 영사관 담을 너머 바로 옆에 있는 미국 영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우는 다 좋았어요. 한국 영사관과 비슷했는데 환경은 지하가 아니라 윗 층이니까 바깥으로 햇볕이 보이고 ..공기는 엄청 좋았어요”

두 달여간의 조사 끝에 북한 보위부를 위해 일한 혐의를 받은 탈북 남성 한 명이 탈락하고 찰리씨와 두 살위의 브라이언씨 그리고 40대 여성 조하나씨는 7월23일 중국을 떠나 제3국을 거치지 않고 꿈에 그리던 미국 땅에 도착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찰리씨는 미국에서 보낸 첫날 밤 실망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비행장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미국 사람들이니까 그저 이렇구 저렇구..그런데 우리가 딱 부닥친 집이 있잖아요. 우리가 자야할 집 말예요. 그 집을 처음 본 순간에 ‘아! 우리가 너무 허망한 생각을 갖고 미국까지 왔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미국에 오면 너무 잘해주리라 생각하고 왔는데 집에 돌아와보니 그저 침대밖에 없고 덮고 잘 이불도 없구 하니까 참….”

중국에서 미국 영사로부터 미국에 가면 한국처럼 많은 정착 지원금이나 특별 대우는 없으며 일부 지원속에 혼자 자립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부푼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찰리씨와 탈북자들!

하지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찰리씨는 마음을 추스리고 4년전 북한을 처음 탈출했던 때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 때는 허망해도 한국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무슨 생각을 했냐면 북한에서 처음 중국에 처음 나왔을때를 생각했어요. 그 때도 살았는데 지금은 집도 있는데 왜 못사냐..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다음날 찰리씨와 다른 탈북자들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자신들을 돕기로 자원한 지역의 한인 송인범 박사에게 당장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탈북자 등 미국에 입국한 모든 국제 난민들은 흔히 난민단체가 제공하는 영어학습 등 2달간의 정착 프로그램을 들으며 취업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막무가내로 조르자 송인범 박사는 할 수 없이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해서 그날로 바로 탈북자들에게 일자리를 구해줬다고 말합니다.

“그 분들은 처음부터 영어공부하는데 주력을 두지 않고 돈 버는데 주력을 뒀습니다. 난민 기관에서는 2달간 영어 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그 양반들은 돈 버는게 급선무라며 직장을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전 이 동네에서 벌써 30년 이상을 살았기 때문에 여기 저기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제가 직접 직장 주인들을 만나 연결을 시켜줬습니다.”

그러나 첫 직장은 생각만큼 녹녹치가 않았습니다.

베트남 음식점 주방에서 접시 닦는 일을 처음 시작한 찰리씨는 결국 몇 일 만에 두 손을 들었습니다.

언어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고 무엇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는 찰리씨! 송박사는 다시 찰리씨를 한인이 운영하는 시내 중심가의 한 일식 전문점에 소개시켜줬고 그 곳에서 찰리씨는 난생 처음 스시맨이란 직업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찰리씨는 이 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예요. 이런 (스시)책을 보면서 …아 뭘 더 추가하면 손님들이 더 편리할 수 있겠는가?”

스시일이 적성이 맞는지 잠을 적게 자고 일을해도 예전 보다 힘이 난다는 찰리씨는 이젠 전문 책들을 보며 자신만의 독특한 음식을 만들겠다고 의지를 불태웁니다.

“힘들고 그래도 아침에 어떤때는 3~4 시간 자고 일어날 때도 있는데 일어나게 돼요. 아마 중국에 있었다면 못 일어났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앞으로의 계획이 확고하니까 일어나게돼요. ‘내가 열심히 하면 반드시 뭐가 된다!’ 하는 희망이 있으니까!”

일식집에서 함께 일하며 찰리씨의 솜씨를 눈여겨 보던 인도네시아계 동료 하디씨! 하디씨는 유기농 수퍼마켓 체인점인 ‘홀 푸드’의 생선초밥 매니저로 직장을 옮기면서 찰리씨에게 함께 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디는 찰리씨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랐지만 눈치가 빠르고 새롭게 가르친 일을 금새 배우는 것을 보고 그와 계속 함께 일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하디씨는 그러나 요즘 매일같이 찰리씨에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영어 공부를 위해 텔레비젼을 자주 시청하고 미국인들과도 자신있게 대화하라고 권고하는 하디씨! 하디씨는 찰리씨의 능력을 높게 사 그를 정식직원으로 채용할 것을 간부들에게 건의했다고 말합니다.

찰리씨 역시 시간이 갈수록 영어공부가 절실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스시 만들때는 손님들이 와서 원하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 것에 대해 이건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해드려야 하는데 잘 못하는 거예요.”

찰리씨는 올 여름 영주권을 발급받으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할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여름까지는 그렇구 가을부터는 공부해야죠. 영주권 나온 다음부터는 공부해야죠. 그 때 부터는 저희가 바쁜 일(서두를 일이) 없어요. 그냥 마음 놓고 편안히, 그저 먹고 살 돈만 있으면 그 다음에 남는 시간은 모두 공부할 거예요. 대학은 반드시 갈 거예요.”

다행히 화교계 인도네시아 난민 출신인 하디씨가 중국어를 조금 구사해서 두 사람은 직장에서 중국어로 대화를 합니다.

찰리씨는 중국에서 4년간 머물며 익힌 중국어 회화 능력과 사회 경험이 미국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중국에서 일할때는 하루에 평균 15시간씩 일했어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코피도 터지고 입술도 터지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공사장에서 벽돌짝 나르고 다음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나중에는 병원에서 일했어요. 늘 항시적으로 나가서 일할때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는 것이 힘이다! 힘겹게 일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했어요.”

다른 탈북자들과는 달리 북한에서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찰리씨!

“북한에 있을 때는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고 살았어요. 어머님이 다 해주시니까. 끼니는 굶는 일이 없었어요.”

찰리씨는 탈북을 하게 된 동기 역시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대가기 싫어서 도망친 것이라며 머쓱해 합니다.

“군대 가기가 싫은 거예요. 군대가야 하는데 어머니와 둘이 살다가 혼자 군대 간다니까 겁도 나고 내가 왜 군대가야 하나…..그래서 안가면 안되나 물었더니 무조건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초모 기간만 피해다니면 괜찮겠지 하고 (중국에) 나왔는데 정작 나와보니까 다시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구요.”

찰리씨가 중국행을 결심한 배경에는 북한에서 그의 취미가 한국 드라마 등 외국 비디오 시청이었다는 사실도 한 몫을 했습니다.

“밤마다 돈내고 보구! 집주인한테 돈 주구 봐요.! 그게 취미였어요. 가만히 아이들끼지 돈 모아서 보러가곤 했어요.”

그 당시 봤던 한국의 드라마들은 찰리씨에겐 모두 별천지 였습니다.

첫사랑! 그걸 비디오로 봤어요. 그걸 볼 때 핸드폰이 나오는데…아 저게 뭐지? 근데 드라마에서 “핸드폰 안 받어?” 하는 대사 듣고 아 핸드폰! ‘근데 왜 북한에는 저런 것 없지?’ 하는 생각, 또 일반인들이 그냥 차타고 다니고…우린 언제 저렇게 되냐? 하고 (친구들끼지) 애기만 했었죠”

비디오를 함께 본 북한의 친구들에게 지금 미국의 생활을 얘기해 준다면 반응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찰리씨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짓습니다.

“그 친구들은 자기들의 세계관으로 사는거예요. 만약에 걔네들이 지금의 미국에 있는 나를 보면 갸네들 입에서 ‘배신자’ 란 소리밖에 안나올거예요. 걔네들이 진정한 세계를 보지 못하는 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아요. 제가 그들에게 (세상에 대해) 인식을 시켜주려면 너무나 어려울것 같아요.”

그러나 북한의 친구들과 달리 지금도 가끔 전화 통화하는 중국내 탈북자 친구들은 반응이 전혀 다르다고 찰리씨는 말합니다.

“(중국의 친구들은) 당연히 (미국에) 오고 싶어해요. 그런데 우선 브로커를 찾기가 쉽지 않고, 둘째는 도박하는 것이 겁이나죠. 브로커에게 자기 목숨을 한쪽 다리는 들여 놓고 와야 하는데 마치 저승과 이승사이에다가요. 아직 담이 안서는거죠.”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한번 중국에 와서 외부세계의 맛을 보면 다시 폐쇄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가족을 제외한 북한은 단지 먹물을 내뿜는 어둠 그 자체일 뿐이라고 탈북자들은 말합니다.

찰리씨는 미국과 북한의 생활을 비교하면 "완전히 반대”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전부가다 다르죠. 딱 반대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전부가 다 반대예요. 미국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행동하고 헌신하고 하는데 북한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생각이 들죠. 도덕 등 모든면에서 봤을 때 미국이 낫죠.”

좋은 것을 맛보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겠죠. 찰리씨 역시 4년간의 중국내 이방인 생활을 접고 미국에 온 것이 이젠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차츰 살면서 보니까 미국에 온 게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구요. (중국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미국이 우월하다고 생각해요. 중국에서는 그냥 계획을 잡을 수가 없잖아요. 안정된 생활이 아니니까요. 그때그때..그러니까 제 인생은 이곳 미국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아직 젊은 나이어서 그런지 늘 패기가 넘치는 찰리씨! 앞으로 힘들었던 과거보다는 밝은 미래만을 생각하겠다며 중국에서 배운 속담까지 인용합니다.

“파기가 있어야 보구가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이구 낡은 것은 생각하지 말구 버리자는 얘기죠. 그런거 봐서는 과거 자꾸 생각하면서 옛날에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까 오늘은 아끼며 살자란 생각보다 지금 이만큼 살면 앞으로 더 잘 살겠다! 이런 생각 즉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만 보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꿈을 펼치자면 실패도 자연히 따르기 마련!

찰리씨는 최근 운전 면허증 필기 시험에 합격하고 주행 시험을 치러 갔다가 제대로 테스트도 받지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시험관이 그냥 와 가지구 차 시동 걸라고 하는데 내가 당황해서 못 알아 들으니까 영어도 모르면서 왜 왔냐고 하면서 그냥 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에 영어 잘 배운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했죠. “

찰리씨는 시험에 떨여졌는데도 그저 여유만만 입니다.

실제로 어안이 벙벙할때는 평소 알아듣던 얘기도 못듣고 못 알아듣죠. (웃음) 모르죠. 앞으로 몇 번 더 떨어질지 ….킥킥킥…”

찰리씨는 그러나 자신이 미국 생활에 자신감을 갖게된 배경에는 자기를 도와준 많은 온정의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특히 이 지역의 한 대학에서 20 여년간 경제학 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77살의 송인범 박사는 찰리씨 등 탈북자 3명에게는 은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송박사님 없었으면 아마 지금도 헤매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분이 처음부터 우리 생활의 어려운 문제들을 다 풀어주세요. 서류 작업에서부터 전부다…박사님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왔어요. 그리고 처음 일을 시작해서 새벽 2시에 일을 마치고 하는데 매일 같이 기다렸다가 우리를 차에 태워주시고 그랬어요.”

찰리씨와 브라이언씨가 미국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하는 송인범 박사! 송박사는 자신이 지난 1958년 미국에 처음 유학와서 스스로 돈을 벌며 어려운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저 힘든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제 자신이 집의 돈도 없이 혼자 고학을 했기 때문에 누구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가 알 때에는 마음속으로 거절을 못합니다. 그저 자진해서 도와주고, 도와준다는 뜻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발이 가고, 손이 가고 움직입니다.”

일주일에 6일 동안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빡빡한 일정이지만 찰리씨는 가끔 일식집에서 일하는 미국 종업원들과 어울리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말합니다.

“낮에는 일하다가요 저녁에는 가끔 미국 친구들과 볼링도 가구요. 저녁이면 일 끝나고 술 마시기도 하구 그래요.

찰리씨와 자주 어울리는 교회 친구 피터씨는 찰리씨가 매우 낙천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그가 오랜동안 함께 지내온 형제처럼 편안하다고 말합니다.

피터씨는 그러나 찰리씨가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고 말합니다.

피터씨는 그러나 찰리씨와 함께 지낼수록 그가 자기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느끼게 됐으며 북한 상황은 들을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찰리가 미국에 와서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참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찰리: “이 분이요. 옆에서 자꾸 나한테 마이 프렌드라고 해요. 자기 친구래요!”

홀 푸드 마켓의 찰리씨 옆에서 케잌과 파이를 팔고 있는 흑인 아만다씨! 아만다씨는 영어가 아직 서툰 찰리씨를 볼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항상 먼저 인사를 건냅니다.

아만다씨 역시 찰리씨가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조금 놀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힘든 곳에서 온 그가 자기와 함께 일하게 돼서 행복하고, 특히 어린 찰리가 낯선 곳에서 잘 적응하고 영어실력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늘 격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찰리씨는 주위에서 이렇게 자신을 북돋아 주는 좋은 친구들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 하다고 말합니다.

“공부해야 앞으로 잘 살수 있고 매일 일만 하고 살수 없잖아요. 어떻게 계속 일만 하고 살아요. 제가 나중에 비지니스를 하려면 많이 알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공부는 필수적인 것이죠. 그래서 공부를 꼭 하고 싶어요.”

찰리씨는 그러면서 북한 사람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게으를 것이란 주위의 우려를 일축하며 체제가 문제이지 북한 사람은 천성적으로 근면함을 갖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예요. 노력에 대한 대가가 있으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예요. 중국에서 있을 때 북한 사람들 (중국) 나와서 일 못한다는 소리 듣는것 못봤어요. 일은 다 잘해요. 그리고 뭘 하겠다는 의욕이 강하구요. 북한 체제가 문제죠. 또 북한 사람 일할 때 보면 몸 아끼지 않고 일하는 사람 많이 봤거든요.”

찰리씨는 탈북자들이 미국에 많이 들어와서 스스로 성공을 일구어 가는 얘기들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탈북자들은 먼저 허망한 마음을 버리고 와야 할 것이란 충고도 잊지 않습니다.

“미국에 대해 너무 허망한 생각 갖지 말고 미국에 와서는 자기 노력한 것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고 자기가 뭐 하겠다 하면 정부에서도 도움주고, 그리구 시스템도 잘 돼있잖아요. 그런 시스템들을 잘 이용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기회들이 많을 것 같아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고의 스시맨이 되겠다는 켄터키의 탈북자 찰리씨!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주먹을 꽉 쥐는 찰리씨의 자심감 속에서 탈북자들의 어메리칸 드림이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캔터키주에서 VOA 뉴스 김영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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