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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흑인들의 사각지대


한국을 떠나오기 전날, 가족들과 모여 식사를 하던 중 우리 고모부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게 꼭 한 가지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윤영아, 밤중에 얼굴에 후레쉬 달아야 하는 사람은 좀 곤란해, 알겠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고, 절대 그런 일은 만들지 않겠노라 모두에게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흑인이라고 하면, 그 이름만으로 그저 괜한 거부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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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몇 곳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는 특별히 흑인을 마주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태원 같은 흑인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는 여자들끼리 가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흑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못합니다. 그저 멀리해야 될 사람, 정도의 인식쯤이랄까요. 저 역시 옷깃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뼛 설만큼 그들은 제게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적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요.

24년 동안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왔던 블랙피플. 그런데 지금, 이제 겨우 열흘 남짓 그들을 경험하고 나서 뭔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제 눈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이 너무 많아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왠지 모를 슬픈 눈동자 속에 서려있는 고단한 삶. 이렇게 느끼면서도 저 역시 아직까지 그들에게 선뜻 다가서는 것이 쉽지 않기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참 가식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I-HOUSE의 주방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 우리들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책임져주시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주방장이라기보다는 식사를 준비하는 것부터 정리까지 식사에 관계된 모든 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들이지요. (구분을 짓는다는 것이 좀 그렇지만)그중에서도 제가 DC에 와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블랙피플’이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분입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말씀해주셨는데 기억하기가 너무 어렵네요, ‘미스터 쉐프’라고 해두죠)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식기를 집는 것부터 밥(은 아니지만 편리하게 밥이라고 하고)을 그릇에 담는 것까지 모든 것이 낯설어 당황해하던 저에게 미스터 쉐프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한 번 들은 제 이름까지 기억하고서는 며칠 뒤에 식당에서 마주치자 “그레이스, 오늘 저녁도 맛있게 먹어!” 라며 환하게 웃어주었습니다. 힘든 하루하루 속에서도 I-HOUSE 누구에게나 친절한 미소를 건네는 미스터 쉐프. 그 역시 가족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흑인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곳 DC에서의 흑인은 조금 특별합니다. (다른 주는 가보지 않아서 미국 전체라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좀 힘드네요) 미국의 중심이라는 워싱턴,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거리의 곳곳은 구걸하는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물론 흑인입니다. 거의 10m 마다 한사람씩 “Spare money please"를 외쳐댑니다. 지난해 카트리나에서 드러났던 ‘미국의 수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요. 여전히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특별한 존재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예전보다는 그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본 바로 어렵고 힘든 육체적인 노동은 대부분 흑인들의 몫입니다. 백인 버스운전수나 금발의 식당아주머니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얼마 전 마틴 루터 킹 데이에 스미소니언에 동행했던 하이디라는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난 절대 미국에서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넌 워싱턴에서 지내본 느낌이 어때?” 스미소니언의 한 박물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하이디. 그녀는 꽤나 반부시주의자였습니다. 그런 하이디에게 “사실 난 여기오기 전까지는 이라크 전쟁에도 찬성했었고 한국은 미국에 무조건적으로 동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물론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탓도 있지만 말야. 그런데 지금은 좀 혼란스러워. 우리나라에도 물론 극빈층이 존재하지만 이정도 규모는 아니거든. 수퍼 파워의 심장이라는 곳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정말 몰랐어. 한때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었다는 나의 말에 하이디는 기겁을 했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에 내심 안도하는 듯 했습니다.

블랙 피플. 소외계층이라고 일컬어지기엔 미국사회에서 그들은 너무나 커다란 그룹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트리나’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이 미국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구요. 이런 모순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워싱턴을 마치 유토피아쯤으로 여겼던 제게는 아주 커다란 혼란으로 느껴집니다.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그저 방치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일까요. 백악관, 부시, 워싱턴, 힘, 국제질서 그리고 블랙 피플. 제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DC에서의 생활입니다. 돌아갈 때 즈음이면 나름의 결론을 내려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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