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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이후 극심한 식량난 시기를 겪었던 당시 10세 이던 정정기씨 수기 [탈북자 통신 김기혁]


북한에서는 지난 1990년대 중반이후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많으면 100만 명 이상이 아사했다는 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미국의 소리 탈북자 통신원은 오늘부터 삼회에 걸쳐, 당시 10여세 어린나이의 소년이 어떻게 가족과 헤어져 꽃제비생활을 하면서 식량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또 식량을 찾아 중국과의 국경지대로 떠났던 어머니와 두 누나가 인신매매등 각고의 어려움을 겪은 끝에 어떻게 7년만에 중국에서 막내와 극적인 상봉을 했고, 2003년 한국에 입국한 뒤, 한국에서는 어떻게 정착하고 있는지 등을 소상히 전해 드립니다.

현재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탈북 청년 정정기 씨(21세, 2003년 입국), 20대 초반의 나이지만 쉽게 꺼내기 힘든 고통스런 기억이 있습니다. 식량난 때문에 12살에 어머니와 누나들과 헤어져 5년간 북한에서 꽃제비로 떠돌아야 했던 기억입니다.

94년까지만 해도 평양의 배급 사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5년에 접어들자 ‘고난의 행군’이라는 구호가 나오면서 갑자기 배급이 끊겼습니다. 간혹 배급이 나오더라도 고작해야 통밀이나 벗기지 않은 수수, 밀가루를 조금 주는 정도였습니다. 노동당원 5만 명을 포함해 50만 명이 굶어 죽은 95년의 북한은 당시 10살이었던 정기 씨에게 참기 힘든 배고픔을 감내하게 했습니다.

[정정기] “집에서도 먹는 거라는 건 그냥 통밀이나 깎으지 않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수수를 삶아 먹고 그것도 배부르게 먹은 게 아니고 일정한 양, 적게, 죽지 않을 정도로 집에서도 먹고 그러니까...”

정기 씨는 배가 고플 때면 배낭을 가지고 가서 농장밭 주변에 심어 놓은 콩이나 옥수수 등을 몰래 따다가 집에 돌아와 가족이랑 삶아 먹곤 했습니다. 그러나 늘 허기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정기 씨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자신과 비슷했지만 그 와중에도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부모들을 가진 애들은 배부르게 먹은 것 같다고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정정기] “그 중에서도 집안에서 돈이라도 좀 있고 재산이 있는 애들, 아빠 엄마가 힘이나 있고 그런 사람들은 좀 배부르게 먹고 그런 것 같애요.”

97년, 풀로 도시락을 채울 정도로 식량난이 심해지자 정기 씨의 큰 누나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사차 무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 전에도 주변 농촌에 나가 식량을 구해온 경험이 있던 누나라 큰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해 정기 씨의 어머니가 “누나를 찾아서 빨리 오겠다”고 하면서 둘째 누나와 함께 무산으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정기] “그냥 기다리라 해놓고 갔는데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안 돌아오니까 죽었나 보다 했는데....”

아버지와 함께 남겨진 12살의 정기 씨. 그나마 의지가 됐던 아버지도 정기 씨가 14살 되던 99년, 직장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증산교양소에 끌려가고 맙니다. 증산교양소는 노동 강도나 처우가 나쁜 것으로 악명 높은 곳인데 원래 위병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정기] “증산교양소에서는 잡곡을 진짜 한마디로 돼지가 먹는 그런 식으로 주는데, 저도 그런데 들어가서 몇 번 먹어봤는데, 그걸 소화 못 시키니까 한마디로 병으로 그 안에서 죽었거든요 나오지 못하고....”

혼자가 된 정기 씨는 친척들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모두가 힘들었던 때라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움이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오게 되는데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정정기] “나도 그런데 대해서 진짜 몰랐었거든요. 평양 역전에 갔어요. 평양 역전에 갔는데 진짜 배고프고 그러니까 어떤 때는 땅에 있는 걸 주워먹고 역전에서 밥 먹는 사람들 것 조금씩 얻어도 먹고 그랬었거든요.”

이렇게 꽃제비 생활을 시작하게 된 정기 씨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처음엔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망도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자 “나에겐 가족이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정정기] “처음에 진짜 원망도 많이 하고 나 버리고 갔다고 그런 말도 많이 하고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한 2-3년 혼자 살다보니까 그런 생각도 자연히 없어 지더라구요. 처음에는 진짜 엄마랑 누나들이랑 보고 싶고 막 그랬었는데 한 2-3년 지나니까 그것도 없어지고 보고싶은지 마는지 나에겐 그냥 가족이란 게 없다 이런 생각만 드니까..”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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