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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내면세계의 자유로운 표현이 북한에는 존재하지 않아” –탈북자 출신 미술가 [탈북자 통신: 정세진]


예술의 기본특성인 작가 내면세계의 자유로운 표현이 북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한 탈북자출신 미술가를 서울에 있는 [정세진]탈북자 통신원이 만나 북한의 예능교육과 예술인들의 현실에 관해 들어 보았습니다.

99년 한국에 입국한 김기혁(가명, 35세)씨는 북한 서부철도총국 미술창작사와 조선인민군 25후방총국에서 10년간 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김씨가 주로 그려야 했던 것은 서부철도총국 관할하에 있는 역사(驛舍)와 후방총국 관할 하에 있는 사업장에 걸리는 김부자(父子) 초상화였습니다.

김기혁씨는 북한에는 “작가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 같다”며 “작가 내면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도 안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1] “북한에는 작가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 같애요. 지금 한국에서 생각하는 작가는 개인이 혼자서 활동을 하면서 예술활동을 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북한은 그 모든 사람이 하나의 조직에 묶여서 미술창작을 하는 거지요. 미술창작을 하는데 가장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김부자 우상화 선전이고 두 번째는 자기 예술적인 창작을 하는 건데 그것도 다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있는, 한국에서 말하는 작가 내면의 세계라든지 이런 것은 생각을 할 수 없고, 생각도 안 해요.” 김기혁 씨는 북한에서는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분야를 북한 체제를 선전.포장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면서 그 때문에 예술가를 양성할 때도 재능뿐만 아니라 계급적 성분을 따지게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인터뷰2] “북한은 예술이라고 하게 되면 북한이 항상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근로 인민대중을 위해서 복무하는 게 북한 예술의 최종 목표인데 그거는 선전의 불과한 거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을 사람들의 사상을 세뇌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거든요. 미술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모든 것을 다 북한 체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포장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교육적 토대가 좋아야 되겠지요.”

북한에서 화가가 되는 길은 국가 주도로 이뤄지는 교육과정을 거쳐야만이 가능합니다. 다른 예술분야도 그렇지만 특히 미술분야는 철저한 엘리트 교육으로 이뤄지는데 소학교 1-2학년부터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각 도(都)에 1개씩 있는 예술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게 합니다.

고등중학 과정까지 교육이 끝나면 실력이 있고 토대가 좋은 아이들은 북한 최고의 미술대학인 평야미술대학에 진학을 시키고 그 외의 학생들은 해당 예술대학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김기혁 씨의 경우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예술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전국 소묘 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성예술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간부도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예술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평소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김기혁 씨는 전국대회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원하던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뷰3] “그래서 사실 군대도 안 나가게 됐고 대학에도 진학을 하게 된 거지요. 저한테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참 운이 따랐다고 봐야 돼지요.” 4년제 예술대학을 마치고 미술창작사에 배치돼 김부자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김기혁 씨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감정도 주어진 틀에 맞춰 갈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합니다.

[인터뷰4] “예술은 다 같지 않습니까. 사람의 심리는 다 같은 거라구요. 사회주의 예술을 표방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예술적인 고뇌나 정열이라는 것이 다 무시되는 것이 아니지만 거기에 맞추는 거지요. 자기의 감정과 이런 패턴까지도 다 그 이데올로기적인 틀에 맞추는 거지.....” 90년대 중반 식량난이 닥쳤지만 북한에서는 힘 있는 기관인 철도총국과 인민군 후방총국에서 김부자 초상화를 그렸던 김기혁씨는 생활이 그렇게 곤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북한 사회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 한국 방송을 들으면서 한국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고 마침 한국에 있는 친척과 연계가 되면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기혁 씨가 탈북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갓 돌을 지난 아들의 미래가 눈에 밟혔기 때문입니다.

[인터뷰5] “새로운 뭔가 새로운 것을 맛보고 싶고 보고 싶고 또 그런 욕구가 있고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아들이 태어나니까 생각이 또 바뀌더라구요. 나는 지금 이렇게 해서 내가 이렇게 됐는데 우리 아들의 장래는 또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남한 방송을 들으면서 동경도 생기고 그래서, 사실 저는 중국을 목표로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북한을 나온 게 아니고 한국을 목표로 해서 떠날 때 떠났거든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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