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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미국사] 제 10대 타일러 대통령,  캐나다 국경선 문제 영국과 타협


1840년의 대선에서 월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장군이 미국의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휘그당 소속이었습니다. 밴 뷰렌 대통령의 패배는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의 패배는 민주당으로서는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해리슨 대통령은 재임한지 얼마안돼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존 타일러(JOHN TYLER)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을 비롯한 휘그당의 지도부는 신임 대통령을 조종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일러 신임 대통령은 독립성을 과시했습니다.

클레이는 새 휘그당 행정부를 위한 다양한 법안들을 제안하였습니다. 그중에는 국립은행을 창설하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이 안은 클레이가 제출한 법안의 목록중에서 매우 비중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타일러는 클레이가 제출한 안들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타일러는 평화와 당의 단합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클레이가 아닌, 그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타일러는 국립은행의 창설을 요구하는 2개의 법안을 거부했습니다. * 내각에서 클레이의 지지자들은 타일러로 하여금 은행법안에 서명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통령이 서명을 거부했을때, 휘그당의 지도자들은 내각이 사퇴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내각이 사퇴함으로써 대통령이 혼자서 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 웝스터(DANIEL WEBSTER)를 제외한 모든 내각의 각료들은 사임했습니다. 웝스터 국무부장관은 사임서중 한 통이 도착했을때 대통령과 함께 있었습니다.

“각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웹스터가 물었습니다.

“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십시요” 타일러가 대답했습니다.

“각하, 만약 제게 결정권을 주신다면 저는 남아있겠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일어서며 “나에게 조력이 되어 주십시요. 나는 이제부터 헨리 클레이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타일러는 새 내각을 발표하였습니다. 각료중에는 헨리의 클레이의 지지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두번째 은행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국립은행 창설을 원했던 사람들로부터 큰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휘그당 소속의 상당수 상원의원들은 회의를 연후 투표를 통해 타일러를 당에서 추방하기로 했습니다. 은행 법안들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휘그당은 클레이 상원의원의 다른 법안 역시 잊지 않았습니다.

클레이는 특히 국유지를 매각함으로써 얻는 공금을 다른 지방 정부에게 나누어주는 법안의 승인을 원했습니다. 타일러 자신은 이 법안을 지지하였습니다. 여러 지방 정부들은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배분 법안이라고 불리워진 이 법안은 지방정부로 하여금 빚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법안을 지지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안에 한가지 위험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만약 국유지를 매각해 얻은 모든 자금을 지방정부에게 나눠어 준다면 연방정부의 재정이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타일러는 의회가 연방정부의 재정확보를 위해 수입과세를 인상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습니다. 남부 사람으로서 대통령은 수입과세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배분 법안을 수용하기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가지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지방정부로의 자금의 분배는 만약 수입과세가 20% 이상 인상될 경우 일시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해 이는 정식으로 효력을 발생했습니다.

그 다음해 부터 정부는 자금이 부족해졌습니다. 정부는 갖고 있는 자금보다 더 많은 지출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의회는 수입세를 늘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떤 것은 20%이상이나 되는 고율의 세금이었습니다. 이 법안은 상원과 하원에서 근소한 표차로 통과됐습니다.

그러나 타일러 대통령은 이 법안을 거부했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그토록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 판매로 나온 돈을 주에 계속 지불하는 것은 옳지못하다고 말했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연방 정부 또한 토지 판매로 나오는 자금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휘그당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시키고 그 법안을 다시 통과시킬만한 지지표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들은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것은 수입 세금을 인상하되 연방정부 돈을 주 정부에 지불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휘그당이 당의 입법안 실패에 대해 실랄한 연설들을 하는 동안 타일러 대통령은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국은 캐나다와 미국 북부 지방의 경계선 문제로 영국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의 메인 주는 서로 말썽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영국은 또 미국이 캐나다 반군을 지원한데 분개했습니다. 캐나다 군은 나이아가라 강(NIAGARA RIVER)을 건너 반군에게 보급품을 수송하던 선박 한척을 불태웠습니다.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 국무장관은 영국과의 평화를 원했습니다. 이때 영국에서는 내각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영국 외무장관 아버딘(LORD ABERDEE)공도 평화를 원했습니다.

아버딘은 특별 대표로 애쉬버튼(LORD ASHBURTON)공을 미국에 파견했습니다. 애쉬버튼은 미국인 부인을 두고 있었으며 다니엘 웹스터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842년 봄 미국과의 협상권을 갖고 워싱턴에 도착했습니다. 애쉬버튼 공은 나이아가라 강에서 미국 선박을 불태운데 대해 영국이 설명이나 사과를 하지않았다는 점에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두사람은 캐나다와 메인주의 경계선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웹스터는 국경선에 대한 타협안을 제시했으며 애쉬버튼은 이를 수락했습니다. 이 합의로 분규에 관련된 거의 만 8천 평방 킬로미터의 땅이 메인에 흡수됐습니다. 캐나다는 만 2천여 평방 킬로미터의 땅을 갖기로 했습니다. 상원은 웹스터 애쉬버튼 합의를 승인했습니다. 이로써 미-영 관계는 개선됐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또 다른 문제, 즉 텍사스 문제에 부딛쳤습니다. 텍사스는 밴 뷰렌 대통령때부터 연방에 편입되기를 희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텍사스 문제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연방의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웹스터 국무장관은 텍사스의 주 편입 문제에 냉담했습니다.

북부인인 그는 영방에 또 하나의 노예 허용주가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웹스터와 그의 동료들은 버지니아를 제외한 지역에서 타일러 대통령을 지지하는 휘그당의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따라서 타일러 대통령은 텍사스 문제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웹스터는 상원이 애쉬버튼공과의 협약을 승인한 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행정부 내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국무장관직을 사임했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1843년 버지니아의 지지자중 한명인 에이벨 엽셔(ABEL UPSHUR)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업셔는 노예제도를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부의 농업을 위해서는 노예가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업셔는 영국이 텍사스의 노예제도를 금지시키려 하고 있다는 보도에 우려를 갖게됐습니다. 이들 보도는 텍사스가 노예를 풀어주면 영국이 텍사스의 독립을 약속하고 경제 원조를 제의했다고 전했습니다. 업셔와 다른 남부 인들은 그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올 것인지를 두려워했습니다. 인근 남부 주에 있는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텍사스로 탈출을 시도할 것이었습니다. 또 노예 폐지 주의자들은 텍사스주를 남부에 대한 정치선전의 본거지로 이용하려 할수도 있었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이 텍사스에 관심을 갖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는 텍사스의 주 승격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당의 창설, 즉 자신을 재임시킬수 있도록 하는 정당의 창설을 가능하게 할수도 있었습니다. 업셔는 국무장관 취임 4개월만에 텍사스의 주 승인 협정을 제의했습니다. 텍사스의 샘 휴스턴 대통령은 처음 그 제의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결국 협상을 하기로 합의했으나 미국이 두가지 조건을 수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조건은 텍사스가 멕시코의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이 보호를 해줄 것, 미국 상원이 이같은 조약을 승인할 것이었습니다. 업셔는 워싱턴에서 텍사스 대표들에게 조약에 체결되는즉시 텍사스는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상원의 3분의 2가 동의를 해야 합병 조약이 승인된다는 점을 알렸습니다. 휴스턴은 만족했습니다. 뒤를 이어 그의 대표들은 업셔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회담이 완결되기전 업셔는 대통령과 의회지도자들과 함께 포토맥 강을 여행했습니다. 이들은 두개의 대형 함포가 장착된 새 군함을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 포는 대통령을 위해 발사될 예정이었습니다. 예포가 발사될때 업셔는 포의 바로 옆에 서있었습니다. 포가 발사되면서 포신이 터지는 바람에 업셔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사망했습니다. 대통령은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이 사고로 인한 부상자는 19명에 달했습니다.

타일러 대통령은 민주당인 죤 칼훈(JOHN CALHOUN)을 새로운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거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칼훈이 텍사스가 연방에 편입돼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 또 하나는 칼훈이 휘그당인 자신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줄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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