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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때문에 고통받은 앤드류 잭슨 장군, 대통령에 당선



1828년의 대통령 선거는 거칠고 타락한 것이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몬로의 구 공화당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죤 퀸시 아담스 대통령과 헨리 클레이 국무장관을 지도층으로 하는 세력으로 자신들을 공화당이라 불렀습니다. 또 하나는 앤드류 잭슨 장군을 지도자로 하는 세력으로 이들은 민주당이라 불리웠습니다.

각당은 자신들의 신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데일리 내쇼날 저널(DAILY NATIONAL JOURNAL)은 아담스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합중국 텔레그라프(UNITED STATES TELEGRAPH) 는 잭슨 장군을 지지했습니다.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이 행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텔레그라프 지가 게재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널 지는잭슨을 비난했던 앞서의 팜플렛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이 팜플렛은 여러가지 비난과 함께 잭슨은 마치 개를 쫓듯이 어떤 남자를 쫓아버리고 그의 부인을 차지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후 잭슨의 생애에 계속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잭슨은 테네시주 내쉬빌 근처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서 라첼(RACHEL)이라는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라첼과 그의 남편 루이스 로바즈(LEWIS ROBARDS)는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로바즈는 잭슨에 대해 부인과 언쟁을 했습니다. 그는 잭슨과 부인 라첼이 너무 가까운것 같다고 불평했습니다.

잭슨은 그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으며, 그 충고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집을 떠나기전 로바즈를 만났습니다. 로바즈는 잭슨과 주먹 싸움을 할 결심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잭슨은 로바즈가 신사답게 대결을 하려면 주먹싸움 대신 권총 결투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로바즈는 결투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후 이들 두 남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잭슨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로바즈와 라첼은 화해를 했습니다. 라첼은 남편과 함께 켄터키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말다툼을 벌인 다음 부인은 집을 나갔습니다. 법원 기록은 라첼이 앤드류 잭슨이라는 남자와 함께 나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라첼의 가족은 로바즈와의 결혼생활에서 라첼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 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잭슨에게 라첼을 테네시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로바즈는 이들을 따라갔습니다. 라첼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로바즈는 라첼을 협박했습니다. 로바즈는 라첼에게 켄터키로 돌아가지 않으면 강제로 끌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라첼은 도망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라첼은 상인들을 따라 미시시피 통치령의 나체스(NATCHEZ)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오하이오(OHIO)의 컴버랜드(CUMBERLAND)와 미시시피(MISSISSIPPI)통치령을 따라가는 매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잭슨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라첼의 불행은 자신이 야기한 문제였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제 라첼은 잭슨에게 중요한 존재가 됐습니다. 그는 라첼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상인들이 잭슨에게 라첼에게로 가라고 하자 잭슨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이들 집단은 1791년 초에 떠났습니다. 그보다 수주전 루이스 로바즈는 이혼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한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라첼의 가족에게 이들의 결혼이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잭슨은 여러달후 내쉬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라첼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라첼이 로바즈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여서 라첼의 모친은 그 요청을 수락하라고 라첼에게 허락했습니다. 앤드류 잭슨과 라첼은 1791년 8월에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21세였습니다. 이들은 테네시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그후 2년 동안 잭슨은 분주했습니다. 젊은 변호사로써 잭슨은 열심히 일했고 원거리를 자주 여행했습니다.

1793년 12월 잭슨은 루이스 로바즈가 최근에서야 이혼을 했다는 법원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잭슨과 라첼이 결혼했을 당시 라첼은 여전히 로바즈와 결혼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잭슨은 놀랐습니다. 잭슨과 라첼은 서둘러 다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합법적인 결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났습니다. 잭슨은 판사로 재직중이었으며 테네시 정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느날 잭슨은 주청사 밖에서 지사와 부딛쳤습니다. 주지사는 자신의 업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잭슨은 자신도 국민을 위해 어느정도 공헌을 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헌이라니? 주 지사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주 지사는 “당신이 한 위대한 공헌이란 다른 사람의 부인을 데리고 나체스로 간것보다 더 큰 공헌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잭슨의 눈은 얼음처럼 차겁게 떠졌습니다. 주 지사는 칼을 빼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라고 소리친 잭슨은 당신이 그 여자의 이름을 욕보일거야? 라고 소리치며 몽둥이를 들고 주 지사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수년후 잭슨은 술취한 어떤 사람이 잭슨의 결혼에 대해 비난을 가하자 그와 결투를 벌여 상대방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써 잭슨은 자신의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결투장에서 싸움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이 논란에서 이기지 않으면 대통령에 당선될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잭슨은 자신의 결혼을 조사해 공개하도록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두사람이 라첼과 전 남편과의 이혼이 해결되고 난 후라는 것을 알고 결혼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실수가 밝혀지자마자 이들은 다시 합법적으로 결혼했던 것입니다. 위원회의 보고서는 그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워싱턴의 잭슨 지지 신문은 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잭슨 반대 신문은 이를 싣지 않았습니다. 이 신문은 잭슨과 그 부인을 모욕했습니다. 잭슨 장군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러한 악한들로부터 나 자신을 격리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해왔다. 그러나 나의 부인에 대한 비난들은 희생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고 잭슨은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잭슨 반대 신문들은 그에 대한 격렬한 거짓들을 보도했습니다. 잭슨 지지 신문들은 아담스와 그의 부인에 대한 격렬한 거짓말들을 보도했습니다.

이같은 논란의 선거 운동 기간중 두 후보는 한가지 중요한 문제, 즉 노예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스는 노예 문제를 건드림으로써 남부와 서부로부터의 지지를 잃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잭슨도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북부의 일부 공화당 지지를 잃기 원치 않았습니다.

아담스의 침묵은 그가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남부인들은 그가 노예를 반대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잭슨은 남부인들에게 자신이 노예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도 노예 소유주였으며 일생 동안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두 사람과 이들의 정당사이에는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과 공화당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대변했습니다. 많은 대통령 지지자들은 부유하고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부를 운영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전 국민이 선출한 정부 또는 일반 국민에 의해 운영되는 정부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잭슨과 민주당은 보통 사람들을 대변했습니다.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은 정부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믿었습니다.

1828년 10월 31일부터 11월 5일 사이에 각주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날짜에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와 델라웨어(DELAWARE)에서는 주 의회가 선거인단을 뽑았습니다. 다른 모든 주에서는 유권자들이 선거인단을 선출했습니다. 선거인단의 표결결과 잭슨이 178, 아담스가 83표를 얻었습니다. 이는 잭슨에게는 커다란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곤경에 빠졌습니다. 부인은 단순하고 친절하며 남편을 사랑하는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부인 라첼은 한 서한에서 ‘남편에 관한한 그의 성공은 기쁜 일이다.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결코 그같은 일을 원하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라첼은 선거 운동중 자신과 과련된 논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갖고 곤경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선거의 흥분이 가시고 난 다음에 라첼은 힘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첼 잭슨에게 고향 테네시에서 머물며 몸이 회복될때까지 휴식을 취하다가 워싱턴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라첼은 워싱턴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라첼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은 남편이 있는 곳이라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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