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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모의 비극 - 독립추진한 미국인들 멕시코군에


1830년대 초, 텍사스는 멕시코에 속해 있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적은 돈으로 넓은 토지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텍사스로 이주했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이주한 자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로마 카톨릭이 되길 원했으며 멕시코 전통을 따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거주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사태는 악화됐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이었습니다. 그는 텍사스 상황에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은 멕시코와 우호 협정을 맺고 있었습니다. 이 협정은 분쟁이 발생했을때 서로 중립을 지키도록 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텍사스의 미국인들은 1833년 4월,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멕시코의 지도자인 산타 아나(SANTA ANA) 장군에게 제출할 여러건의 호소문을 준비했습니다. 텍사스 거주자들은 산타아나 장군에게 텍사스로 들어오는 수입품들의 세금을 없애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을 또, 미국에서 오는 새 거주자들을 막아달라고 요청했으며 텍사스를 멕시코로부터 분리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미국인 중의 한명인 스티븐 오스틴(STEvEN AUSTIN)은 멕시코 시에 호소문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멕시코 정부와 6개월 동안이나 협상을 벌였습니다. 산타아나 장군은 한가지만을 제외한 모든 요구를 들어줄 것을 다짐했습니다. 즉 그는 텍사스가 언젠가 분리될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스테판 오스틴은 만족했습니다. 그는 다시 텍사스로 돌아가기위해 멕시코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습니다. 그것은 앞서 그가 멕시코 정부와의 협상이 실패할 것처럼 보이던 때에 썼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편지에서 텍사스가 분리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오스틴은 1년 6개월 동안 멕시코 시에 투옥됐습니다.

오스틴은 텍사스 사람들에게 멕시코에 충실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반란의 움직임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거주자들은 이미 그들을 “택산 ( TEXANS)” 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택산과 현지 멕시코 관리들간에 작은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 군대는 위협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오스틴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멕시코 군 사령관과의 협상대표로 뽑혔습니다. 군 사령관은 협상을 거부했습니다.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택산들은 그들 자신의 군대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1835년 11월, 텍사스의 모든 지역 대표들이 이같은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멕시코 공화국에서 텍사스를 빼낼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 제안은 투표로 이미 큰 표차로 패한 안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택산은 자신을 절대 권력자라고 주장한 산타아나에 저항해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임시 주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군대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또 3월 1일부터 또 한차례의 회의를 열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텍사스인들이 다시 회의를 열기전에 산타아나는 7천명의 군대를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텍사스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멕시코 병사들이 샌 앤토니오에 도달한 것은 2월 23일이었습니다. 텍사스 군대는 알라모(ALAMO)라 불리우는 오래된 스페인 교회로 후퇴했습니다.

3월1일, 두번째 택사스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대표들이 텍사스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만들자고 표결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헌법에 기초한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정부를 세웠습니다. 대통령은 데이빗 버넷(DAVID BURNET), 샘 휴스튼(SAM HOUSTON)은 텍사스 군 사령관으로 계속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회의 둘째날, 샌 안토니오에 있는 알라모에서 편지가 날라왔습니다. 그 편지는 텍사스 사람들과 모든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알라모의 텍사스 군 지휘관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24시간동안 야포 공격 속에 있었고, 한명의 병사도 잃지 않았습니다. 적군은 우리들의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살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포로 그의 요구에 응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국기는 아직도 자신있게 휘날리고 있습니다. 저는 항복을 하거나 후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자유와 애국과 모든 미국인의이름으로우리 군대를 최대한 신속히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만약, 저의 부탁에 대답이 없다해도 우리는 싸울 수 있는한 싸울것이며, 자신의 명예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 병사들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알라모에서 온 편지는 “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다.” 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회의 참석 대표들은 즉각 산 안토니오에 있는 택산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샘 휴스튼은 대표들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말하고 택사스를 위해 정부를 수립하는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강조했습니다. 휴스튼은 그 자신이 작은 부대를 이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188명의 군대가 있는 알라모에 지원군이 도착한 것은 너무 늦은 때였습니다. 산타아나 부대는 3월 6일 스페인 교회를 점령했습니다. 전투가 끝났을 때 택산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샘 휴스튼은 모든 택사스 군대에 맥시코 군대와 멀리 떨어진 북동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택산의 한 부대가 신속히 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산타아나는 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택산부대에게 만약 항복을 한다면 이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이들은 들판으로 행군하도록 명령을 받은다음 총살을 당했습니다. 오로지 몇명만이 빠져나와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산타아나는 샘 휴스튼과 대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의 거대한 군대가 나머지 택사스 군을 모두 패배시킬 수 있을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샘 휴스튼은 가까운 친구 사이였습니다. 휴스톤의 후퇴 이야기를 듣자 대통령은 지도에서 택사스를 가리켰습니다. 그는 “만약 샘 휴스튼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의 자리매김을 이곳에서 할 것이다. 이곳이 그가 싸울 곳이다.”

잭슨 대통령은 샌 재신토(SAN JACINTO)강 하구를 지적했습니다.

샌 재신토의 전투는 오후 4시에 시작되었습니다. 택산의 병력은 약 800명이었으며 멕시칸 병력은 그보다 갑절이었습니다. 맥시칸들은 택산들에 밀려 후퇴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결국 후퇴했습니다. “알라모를 기억하라.”고 외치며 택산들은 멕시칸 군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18분후 전투는 끝났습니다. 산타아나의 군대는 괴멸됐습니다. 맥시칸의 절반정도가 죽거나 상처를 입었습니다. 또 다른 절반은 잡혔습니다. 택산중 사망자는 단 두명, 샘 휴스튼을 포함한 스물 세명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택산은 그 다음날 맥시칸 일반 병사의 옷을 입고 있는 산타아나를 발견했습니다. 산타아나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휴스튼은 그에게, “ 자비는 알라모에서 당신이 보여주었어야 했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택산들은 맥시코 장군을 총살하길 바랬지만 휴스튼은 더 살려둘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1836년 5월 14일, 택사스 대통령인 벌넷과 산타아나 장군은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그 조약은 택사스를 독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1836년은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습니다. 앤드류 잭슨은 이미 8년의 임기를 마친상태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대통령 직을 원치 않았으며, 그의 부통령인 마틴 밴 뷰렌(MARTIN VAN BUREN)을 지지하였습니다. 주 정부 권리의 요구에 대한 반대, 합중국 은행에 대한 공격은 잭슨의 민주당에게 문제를 안겨주었습니다. 택사스 또한 문제였습니다.

새로운 텍사스 공화국에서 노예제도는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미국 북쪽지역의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도 노예제도는 없어야 한다고 반대했습니다. 잭슨은 그가 만약 택사스를 승인한다면 민주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질 수 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잭슨은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 택사스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키로 했습니다.

민주당에 대한 주요 반대 세력은 연립 정치 조직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휘그 당원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세명의 휘그 당원들이 마틴 밴 뷰른에 맞서 1836년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휘그당원들은 그들의 후보가 승리를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밴뷰렌이 과반수의 표를 얻는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되면 하원이 선거를 결정지어야했고, 위그당은 좀더 나은 기회를 얻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결국 밴뷰렌이 승리하였습니다.

앤드류 잭슨의 대통령직은 몇달 남지 않았습니다. 그의 남은 임기 동안의 업무는 줄곧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합류 문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잭슨은 텍사스를 주로 만들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연방에 미치는 영향이었습니다. 즉 텍사스의 노예 문제는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는 쟁점이었습니다. 잭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택사스를 주로 승격시키거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은 남 북 아메리카의 분열을 초래할수 있다. 어떠한 것도 이것을 보상할만한 가치를 지닌것은 없다.”

그리고 나서 잭슨은 택사스의 주승격이 국가를 분열시키기 보다는 융합을 가져오록 할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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