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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첫걸음 국가 장래위해 필수, 죠지 워싱턴의 초대 대통령직 수행 철학


미국의 헌법은 1989년 3월 4일부로 효력을 발생했습니다. 헌법은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헌법이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부 기구는 새로운 것이었고 검증을 받은바 없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나라는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같은 지도력은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에 의해 발휘됐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죠지 워싱턴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존재할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에서 미국인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위태로웠던 미국의 태동기 몇년동안 새 나라가 단결할수 있도록 지도했습니다. 워싱턴은 미국인들에 대해 신비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용기와 지혜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1799년 그가 사망한 다음에 그는 마치 신처럼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워싱턴이 실수도 있고 잘못도 있는 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100년이 훨씬 지난 뒤까지도 미국인들은 감히 워싱턴을 비판한다는 것은 생각할수 없었습니다.

최근의 역사가들은 워싱턴을 좀더 사실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워싱턴의 장점과 함께 부족한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 때문에 국가를 만든 워싱턴의 위대성이나 중요성이 약화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인격에서 나오는 힘은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때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 회의에 출석하겠다고 동의하지 않았다면 회의 자체가 열릴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후 초대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는 국가가 힘찬 출발을 할수 있도록 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새 정부의 관료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면 그것을 조정할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같은 논쟁이 국가의 단결을 해치도록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자주 국가의 장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새 출범을 하는 정부가 첫 걸음을 바르게 옮길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하찮은것 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그것이 영구히 문제점으로 굳어지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최초의 정부가 너무 늦어버린 다음에 문제를 고치려 할것이 아니라 출발을 잘 시작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해놓은 바탕위에서 다음 대통령들이 국가 건설의 과업을 계속할수 있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분명하고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공화체제의 정부를 사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잘 못보고 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귀족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것 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흔히 여섯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갔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왕’이라고 비꼬았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국왕과 독재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선량한 일부 사람들이 미국에 왕정을 실시해야 된다고 말했을때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워싱턴은 그런 사람들이 왕정이 주는 폐해를 모르고 있다는데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그같이 안이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바로 미국에 왕정을 가져오게 할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왕정은 미국의 적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워싱턴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곧 미국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워싱턴은 대통령으로써 모든 권한을 동원해, 국가가 왕이나 독재자가 통치할수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또 국민이 가능한한 많이 국정에 직접 참여할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워싱턴은 그같은 정부란 국민이 개인적인 자유,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하는 정부라고 느꼈습니다.

18세기는 국민의 권리에 대한 이해와 논리의 시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워싱턴은 바로 그같은 시대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 자신만큼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워싱턴은 당시의 정책이, 누구에게나 고유 권리인 그같은 축복을 가져다 주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최대의 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워싱턴은 특히 미국이 종교적인 믿음때문에 탄압을 받지 않도록 국민을 보호하는 나라라는 점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국민이 어떤 신을 믿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떤 종교의 신봉자에게나 있으며, 아예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종적 탄압에 대한 워싱턴의 반대 태도는 종교 탄압 반대만큼이나 강렬했습니다. 워싱턴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 제도를 혐오했습니다. 그는 언젠가, “살아있는 사람중 단 한사람도 나만큼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계획을 보고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그가 소유했던 노예는 그가 죽으면서 전원 자유인이 됐습니다.

워싱턴은 처음부터 의회와의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조심했습니다. 그는 헌법에 의해 의회에 주어진 권한은 아무것도 취소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헌법에서 규정한대로 정부의 3권 분립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의회도 협력할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의회도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예를들면 의회는 워싱턴 대통령이 자신의 보좌관들을 임명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그들을 승인하는 권한은 지켰습니다.

워싱턴은 나라에서 가장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일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국무장관에는 토마스 제퍼슨을 임명했습니다. 당시 제퍼슨은 미국 대표로 프랑스에 파견돼 있었습니다. 의회가 제퍼슨을 승인하려 할 무렵 그는 파리로부터 위협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폭도들이 오래된 바스티유 감옥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워싱턴은 염려가 됐습니다. 미국은 독립 전쟁중 프랑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프랑스의 위기는 미국을 어렵게 만들수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태가 악회되면 제퍼슨이 갖고 온 정보는 매우 중요할것 같았습니다. 워싱턴은 또 제퍼슨의 조언이 프랑스 사태뿐만이 아니라 여러면에서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에게는 재무장관을 맡겼습니다. 해밀턴은 독립전쟁중 워싱턴의 보좌관을 지냈었습니다. 대법원장에는 죤 제이를 택했습니다. 제이는 연방 구성안, 즉 헌법에 관한 최고의 설명으로 명성이 높은 문서를 작성하는데 기여한 인물이었습니다. 제헌회의에 참석했던 두 인물, 제임스 윌슨과 죤 러틀렛쥐에게는 대법원의 부대법관직을 주었습니다.

워싱턴은 법무장관으로 법률가이면서 헌법을 지지했던 인물을 원했습니다. 버지니아의 에드먼드 랜돌프가 낙점됐습니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버지니아 안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랜돌프였습니다. 그 안은 결국 헌법의 기초가 됐던 것입니다. 랜돌프는 헌법이 비준되지 못할 것이라면서 서명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버지니아가 헌법을 비준하도록 하는데 많은 애를 썼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각료와 요직 인사들을 임명하고 의회는 이를 승인했습니다. 워싱턴은 이제 국가의 가장 우선적인 일부터 처리해야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미시시피강 남부의 대부분 영토를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미국 농민들은 곡물을 시장에 가져가기 위해 강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지애나의 스페인 총독은 미국 선박에게 운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영국과 통상 협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새로운 나라인 미국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문제로 미국의 경제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큰 문제가 해결돼야 했습니다. 하나는 독립 전쟁때 빌려온 차관을 갚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전국적인 화폐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들 두가지 문제는 신속한 조치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을 담당할 사람은 재무장관인 해밀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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