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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제의 기본틀 다져놓은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미국의 첫 정부는 허약했습니다. 이 나라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재정은 비어있었습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원도 빈약했습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나라의 장래에 대한 의문이 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가 오래 유지될 것인가 불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몇년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같은 변화는 열정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주도됐습니다. 해밀턴은 미국이 강력하고 중요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유럽 국가들처럼 강력한 나라기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공업 발전이 없이는 어떤 나라도 강력해질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이 공업 국가가 될수 있는 계획을 신중하게 수립했습니다. 그는 또 국가 은행과 정부 융자 제도를 만들어 국가의 재정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 은행은 투자에 필요한 돈의 흐름을 늘렸습니다. 이 은행은 또 상공업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해밀턴은 끝으로 외국 경쟁사로부터 미국의 제조업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일부 상품에 세금, 즉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추진됐습니다. 세금이 부과되면서 외국 상품의 미국내 판매 가격이 높아졌습니다. 따라서 미국 업자들은 경쟁사보다 싼 가격에 제품을 팔수 있었습니다.

해밀턴은 관세제도가 미국의 산업을 강화시켜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생필품을 외국 산에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에서 수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외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이 들어올수 있을 것이며 미국 농산물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크게 늘려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남부 지역 농민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 항의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해밀턴이 한 일들이 모두 북쪽의 공업과 은행에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생필품 가격을 비싼값에 사야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은 농산물을 싼값에 팔아야 된다고 불평했습니다.

해밀턴은 자신의 재정계획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승리와 함께 많은 정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문제는 헌법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헌법 논란은 미국 역사상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것은 행정부와 의회가 헌법에 의해 정확하게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느냐 였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헌법이 직접 문서화된 것 외에도 행정부에 여러가지 권한을 준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할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헌법이 행정부에게 국가 은행을 설립하도록 권한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수입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도 행정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밀턴의 반대파들은 그같은 생각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정확하게 표시된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권한도 행정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주장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는 위험할 정도로 많은 권한을 갖게 된다고 반대파들은 말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포함한 여러 논쟁들은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해밀턴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여러가지가 미지상태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떤 사실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만 또 많은 부분은 미스테리입니다. 그의 모친은 서인도 제도에 정착한 프렌취 육게노의 딸로, 이름은 라첼 라비엔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해밀턴의 부친이 누군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에서온 가난한 사업가 제임스 해밀턴이라고 말합니다. 라비엔 여인은 남편과 결별한 다음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열한살때 어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어린 해밀턴에게 [버진 아일랜드]의 [싼타 크루스] 섬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회계장부를 정리 하는 보조 서기일을 했습니다.

어린 해밀턴은 별난 아이였습니다. 다른 어린이들이 놀이를 할때 그는 북 아메리카 식민지의 정치인이 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구할수 있는 책이면 영어든, 라틴어든, 그리스 어든 모두 읽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기업과 경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기능을 익혔습니다. 그같은 글쓰는 능력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거대한 태풍이 불었습니다. 해밀튼은 “The Royal Danish American Gazette라는 신문에 태풍에 관한 기사를 썼습니다. 그 내용은 대단히 뛰어나서, 그의 일부 친구들은 그에게 좋은 교육을 받는데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친구들은 그에게 돈을 주어 뉴욕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이 젊은이의 계획은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돼 상 크로와에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뉴욕에 간 해밀튼은 현 콜럼비아 대학교의 전신인 King’s College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학에 들어갈수 있는 사전 교육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밀튼은 뉴저지주 엘리자베쓰타운에 있는 하급 학교에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진지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밤 12시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조용한 공동 묘지에 가서 책을 계속 읽었습니다. 그곳이 조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논문을 썼습니다. 해밀튼은 그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구사했습니다. 엘리자베쓰타운에서 일년동안 공부한 그에게 킹스 칼레지 입학이 허용됐습니다.

킹스 칼레지 교수들과 학생들은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해밀튼의 글과 말 솜씨에 모두 감탄했습니다. 젊은 해밀튼의 마음속에는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해밀튼은 영국의 통치에 저항했습니다. 보스톤의 식민지인들이 영국배에 올라가 차를 모두 바다에 던지자 해밀튼은 이들을 옹호하는 글을 썼습니다. 다음해가 1776년이었습니다. 13개 식민지는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독립 선언은 전쟁을 의미했습니다. 해밀튼은 어렸을때 다음과 같은 들을 썼습니다.

‘나는 성공하고 싶다. 나는 성공을 위해 생명의 위험도 감수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개성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그런 해밀튼에게 전쟁이 닥쳤습니다. 아메리카 혁명은 해밀튼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군 지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죠지 워싱턴 총 사령관의 귀중한 부관이 됐습니다. 그는 혁명군에게 조달될 물건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치적 역량과 언변을 동원했습니다. 해밀튼은 또, 영향력있는 논설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러해 동안 자신이 설립한 신문 New York Evening Post에 사설을 썼습니다. 그는 제임스 매디슨, 죤 제이등과 Federalist Papers에 글을 썼습니다. Federalist Papers는 미국 헌법에 대해 가장 훌륭한 설명을 하는 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밀튼은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규모 집단을 상대로한 연설에서 뛰어났습니다. 그는 글을 쓸때와 마찬가지로 명료하고 강력하게 그리고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연설했습니다.

제헌 회의에서 대표들이 마음을 바꾸어 헌법을 지지하도록 만든데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사람은 바로 알렉산더 해밀튼이었습니다. 헌법에 의거해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자 해밀튼은 나라의 정치에서 계속 중요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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