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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제 2대 대통령, 프랑스와의 전쟁 가까스로 모면


죤 아담스는 1797년 제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아담스는 죠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서 8년동안 부통령으로 일했습니다. 이제 각주의 선거인단은 그에게 신생국을 이끌어 가도록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아담스는 정당 정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약점은 그의 대통령직 수행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1700년대말, 미국의 정당들은 권력 싸움을 벌였습니다. 아담스는 그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담스는 연방당 소속이었습니다. 대통령으로써 그는 당의 지도자가 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정치적 힘을 획득하고 이용할줄 아는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좌우됐습니다. 해밀턴은 워싱턴 대통령 아래서 재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이제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 평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연방당을 통해 중앙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해밀턴의 측근들은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아담스의 장관 세사람 조차도 해밀턴에 충성을 했습니다. 사실상 이들 세 장관은 오히려 대통령인 아담스에 반대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같은 정치적 상황은 아담스의 대통령직 수행을 극히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연방당의 몰락을 가져오도록 작용했습니다.

아담스의 재임중 가장 큰 문제는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외교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 권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외교적 문제는 프랑스와의 관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연방당원들은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국민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연방당원들은 프랑스 혁명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민중이 프랑스 국왕과 왕비를 살해한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연방당원들은 영국과의 유대를 희망했습니다. 이들은 여러 차례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지지는 공화당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공화당의 지도자는 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을때, 미국을 지원했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이 파리 주재 미국 대표로 근무하면서 다져진 미국과 프랑스의 우호 관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이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부터 관계는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퍼슨의 후임으로 간 미국 대표는 몰락한 프랑스 왕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다음 그는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연방당원들은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친선 사절단을 파리에 보내는데 극력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또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어떤 모욕적인 사건이나 구실을 찾기에 노력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대부분의 연방당원들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화를 통해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의 방위력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담스는 만약 전쟁이 벌어질때를 대비해 미국은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중 미국과 프랑스를 전쟁 일보 직전으로 끌고 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 역사 교과서에서는 그 사건을 ‘X,Y,Z 사건’이라 부릅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하기 위해 세명의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프랑스 관리들은 이들 세사람을 여러주 동안 기다리게 하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기다리는 동안 X,Y,Z 라는 이름의 프랑스인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세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프랑스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정에 서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프랑스 정부에게 1,200만 달라를 빌려줄것, 둘째, 최근 아담스 대통령이 의회에서 반 프랑스적 발언을 한데 사과할 것, 셋째,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25만 달라를 지불할것 등이었습니다.

세명의 미국 각료들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프랑스가 먼저 협정에 서명을 하기 원했습니다. 프랑스 외무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프랑스는 먼저 돈을 받고 그 다음에 서명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원하던 연방당은 드디어 구실을 찾아낸 셈이었습니다. 프랑스가 미국을 모욕했으며, 미국은 당연히 그에 응답을 해야 된다는 것이 연방당의 입장이었습니다.

연방당이 생각하는 유일한 응답은 전쟁이었습니다. 연방당 지지 신문들은 반 프랑스적 정치 선전을 게재함으로써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졌습니다. 몇몇 지역에서는 전쟁 지지 집회가 폭력으로 변했습니다. 공화당은 별로 손을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마져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수도인 필라델피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의회는 상설 육군과 해군을 창설하기 위한 법률을 신속히 통과시켰습니다. 또한 군비 조달을 위한 세금 징수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소수의 지지로 두건의 법이 제정됐습니다. 이들 법은 외국인법과 선동법이었습니다. 연방당은 이들 법이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연방당은 공화당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법을 이용했습니다.

외국인 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누구든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기소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외국인에게든지 추방령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이법은 외국인이 미국 시민권자가 될수 있는 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연장했습니다. 공화당은 분개했습니다. 미국 시민으로 귀화한 외국인들은 대부분 공화당에 입당했었습니다. 공화당은 새로운 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헌법에 명시된것 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들은 외국의 침략을 받았을 경우에만 정부는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권한을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선동법은 정부에 적대적인 행위를 유발할수 있는 어떠한 글도 인쇄할수 없도록 했습니다. 공화당은 이법이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에 위배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연방당은 다시 한번 이법이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연방당은 공화당이 아담스 정부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이 법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로써 25명이 선동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명의 공화당 계열 신문사 관계자들과 공화당 소속 의원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일부 인사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공화당 의원들은 자리를 지키면서 이 법에 대한 반대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비판을 막으려던 연방당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서 국가 안보를 위해 이들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들 법에 서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799년 초 아담스는 프랑스가 관계 개선을 위해 또 한차례 협상을 원한다는 여러건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즉각 새로운 프랑스 대사를 임명했습니다. 연방당 의원들은 새로운 대사의 인준을 거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국 아담스는 프랑스와의 협상을 위해 세명의 각료로 된 위원회를 임명했습니다. 상원은 위원회를 승인했습니다.

양국간 협정 체결을 위해 위원회 소속 세명의 각료가 프랑스로 간것은 그로부터 여러달 후였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여러달이 걸려도 일을 마칠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일을 성사시킨 것은 1800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여러해 동안 국내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아담스 대통령은 드디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방지할수 있는 협정을 성사시켰습니다. 아담스는 나중에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한가지 일이 있었다. 나는 온몸을 던져 프랑스와의 전쟁을 막으려 애썼다. 그리고 나는 성공했다.”

1800년은 미국에서 또 한차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해였습니다. 연방당은 소멸돼 가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연방당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던 계획에 실패했습니다. 연방당은 외국인법과 선동법에 대한 비판을 막아보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당 지도자들은 이번 선거가 당의 권한을 유지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공화당은 보다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공화당은 연방 의회는 물론 주 의회에서도 갈수록 많은 의석수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연방당이 선거 절차를 뜯어고치는데 성공하지 않는한 당 지도자인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될수 있는 가능성은 명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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