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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쟁에 불붙인 보스톤 학살 사건


혁명으로 가는 길은 여러해가 걸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1770년에 벌어졌습니다. 전쟁이 발생한 것은 그로부터 5년후의 일이었습니다.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관계는 매사츄셋즈 주에서 가장 심각하게 악화됐습니다. 그곳에서는 영국 의회에 나갈 대표권도 주지 않은채 세금만 거두어 가는데 대한 반감이 극도로 고조돼 있었습니다.

문제 발생을 막기 위해 영국은 수천명의 영국 군대를 매사츄셋즈 최대의 도시 보스톤에 파견했습니다. 1770년 3월 5일, 긴장 사태는 드디어 폭력 충돌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매우 추운 연말이었습니다. 몇명의 식민지 사람들이 공공 건물을 경비중이던 영국 군인들에게 돌과 얼음 덩어리를 던졌습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영국 군인들은 사태가 두려워졌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군인들의 발포로 식민지인 5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사건을 사람들은 보스톤 학살이라고 부릅니다.

매사츄셋즈 사람들은 극도로 분개했습니다. 군인들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나머지는 경미한 처벌만 받았습니다. 폭력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을 염려한 영국 의회는 대부분의 세금을 폐지했습니다. 오직 남아있는 세금은 차에 부과되는것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긴장은 어느정도 가라앉았습니다. 영국산 상품 수입은 다시 늘어났습니다. 식민지인들은 그후 한두해 동안 사태 진전에 만족하는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매사츄셋즈는 다시 한번 영국과 충돌했습니다. 음악:

문제는 영국 정부가 동인도 회사의 사업을 도와주려 한데서 비롯됐습니다. 동인도 회사는 영국이 통치하는 인도등 여러 나라의 무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773년에 들어 이 회사는 허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회사에게 아메리카 식민지에 직접 차를 수출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식민지는 그러면서도 계속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식민지는 그같은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는 어느 한 특정 회사부터로만 차를 사도록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펜실바니아와 뉴욕 식민지는 동인도 회사의 선박을 영국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매사츄셋즈 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영국 총독은 주민들에게 차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법을 강행하려 했습니다. 배가 보스톤에 도착하자 일부 식민지인들은 그것을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영국 선박들은 화물을 내려놓지 않은채 항구 외곽에 정박했습니다.

1773년 12월 16일 밤, 일단의 식민지인들이 작은 배를 타고 영국 배로 갔습니다. 이들은 영국 배에 올라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이들은 영국인들이 알아볼수 없도록 하기 위해 아메리칸 인디언 복장을 하고 그 배로 갔습니다. 그러나 보스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들을 환호하기 위해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영국의 차를 보스톤 항구의 바닷 물에 던진 사건, 그것을 미국 역사에서는 보스톤 티 파티(Boston Tea Party)라고 부릅니다.

차를 파괴한 것은 중한 범죄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분개했습니다. 영국 의회는 몇사람이 한 행위에 대해 매사츄셋즈 주민 전체에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영국 의회는 여러가지 법률을 승인함으로써 다시 한번 식민지와 영국과의 거리를 벌려 놓았습니다.

이들 법률중 하나는 차값을 지불할때까지 보스톤을 폐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법은 영국 총독의 권한을 강화하고 식민지 관리들의 권한은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774년 6월, 매사츄셋즈 는 모든 다른 식민지들에게 영국에 공동 대응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임을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식민지 대표들이 모인 이 회의는 제 1차 대륙 회의 (First Continental Congress)라 불리웁니다. 죠지아 한곳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식민지들이 대표를 파견했습니다. 대표들은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와의 무역을 관장할 권한 또는 무역에 영향을 주는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는데 동의했습니다. 대표들은 또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법이라면 어떤 입법 단체에도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 1차 대륙 회의는 1763년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에 관한 영국의 모든 조치를 규탄하는 여러건의 문서를 승인했습니다. 이 회의는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할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하자는 매사츄셋즈의 제의를 승인했습니다. 회의는 또 영국 상품을 거부하고 영국은 물론 영국의 다른 식민지에도 물건을 팔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륙 협회를 구성했습니다. 그같은 거부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지방 회의가 조직됐습니다.

제 1차 대륙 회의 참가자중 매사츄셋즈 대표로 죤 애담스(John Adam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해가 지난후 그는 대륙 회의를 열었을때를 회상하면서 아메리카 혁명은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됐었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왕 죠지 2세는 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언했습니다. 영국 의회는 1775년 1월, 매사츄셋즈를 대상으로 군대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사츄셋즈 주민은 지방 의회를 구성하고 전쟁에 나갈 남자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머지않아 무장한 남성들은 매사츄셋즈 전 지역, 그리고 다른 식민지에서까지 군사 훈련을 실시하게 됐습니다.

영국군 장교들은 1775년 4월 명령을 하달받았습니다. 그 무렵 식민지 군대는 보스톤 서쪽 약 30 킬로미터 떨어진 콩코드(Concord)에 무기를 집결시키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이 무기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군대는 그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했습니다.

여러해가 지난후 헨리 와드와쓰 롱펠로우(Henry Wardsworth Longfellow)는 당시의 상황을 시로 읊었습니다. 달리기 라는 의미의 Ride라는 제목의 이 시는 영국군이 온다는 것을 식민지 군대에 알리기 위해 말을 달렸던 세명의 남자들중 폴 리비어의 영웅담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영국군이 렉싱턴(Lexington)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약 70명의 식민지 군대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일분의 장병이라는 뜻으로 Minute Men 이라 불리웠습니다. 단 일분의 예고만을 받고 전투를 할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총격전이 시작됐습니다. 식민지 군대에서 8명이 사망했습니다. 아메리카 혁명에서 누가 맨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양측은 서로 상대방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그때의 총성은 세계에 울려퍼진 총성으로 부리우고 있습니다.

영국군대는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로 향했습니다. 영국군은 그곳에서 식민지 군대가 갖고 가지 못한 보급품은 모조리 파괴했습니다. 다른 식민지 군대가 그곳으로 서둘러 집결했습니다. 콩코드의 북쪽 다리 전투는 영국군을 보스톤으로 돌아가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첫날 이었습니다. 첫날의 전투 결과 영국군 병사 거의 300명이 사망했습니다. 식민지 군대의 사망자는 100명이 못되었습니다.

영국군은 그들의 북과 파이퍼스에 맞추어 행진했습니다. 악대는 앵키 두들(Yankee Doodle) 이라는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영국은 아메리칸들을 모욕하기 위해 그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양키 두들이라는 말은 싸움을 할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혁명 전쟁이 초기를 지나자 아메리카 인들은 기꺼이 양키 두들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렉싱턴과 콩코드의 전투가 있은 다음, 매사츄셋즈 정부는 단체를 조직해 뉴욕주 레이크 챔플레인에 있는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하게 했습니다. 다른 식민지들은 아메리카 군대를 돕기위해 지원병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또 한차례 대륙 회의, 즉 제 2차 대륙 회의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제 2차 대륙 회의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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