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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각종 세금에 반발하는 식민지 정착민들


흔히들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으로 불리우는 French and India War는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 일명 영불 전쟁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북 아메리카를 장악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세계 최 강대국들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영국은 1763년 북 아메리카에서 프랑스를 물리쳤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프랑스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지역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로써 영국은 북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그곳에 사는 거의 2백만명의 주민, 그리고 카나다에 있는 6만명의 프랑스어 사용 주민을 관할하게 됐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책임외에도 영국은 여러 인디언 종족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책임도 져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인디언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내느라 막대한 경비를 지출했습니다.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그 전쟁에 들어가는 자금을 부담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763년의 아메리카 정착민들은 100여년전의 정착민들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이들은 이념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의회가 규모는 작지만 영국 의회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었습니다. 이들 소규모 의회들은 100여년동안 자신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이들 의회가 영국에서처럼 권한을 가져야 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상황도 달라졌습니다. 1707년, 영국은 공식 명칭을 Great Britain 이라 고쳤습니다. 왕은 이제 1600년대 초 처럼 의회를 관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왕이 모든 중요한 문제들, 특히 식민지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왕으로부터 의회로 넘어갔습니다. 프렌취 인디언 전쟁이 벌어질 무렵에는 주요 문제에 대한 결정권, 특히 세금 문제의 결정권이 의회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식민지 의회들도 자기들이 세금에 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갖고 있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신 천지에 조그마한 또 다른 영국을 건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이었습니다. 1763년에 이르자 정착민들은 자신들을 아메리칸 (American)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북 아메리카의 많은 가정은 이제 이곳에서 50년 내지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됐습니다.

이들은 영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처녀지를 개갼하고 집을 짓고 인디어과 싸움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과는 크게 다른 매일 매일의 걱정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이들의 생활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배격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여전히, 식민지는 모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 사람들을 본토 사람들과는 차별을 두어 대했습니다. 정부는 그들에게 특별 세금을 내도록 요구했습니다. 정부는 또 영국 군인들의 음식을 식민지 사람들이 제공하도록 하고, 숙소도 식민지 사람들의 집을 이용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인들을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보호를 한다는 것이냐”라며 못마땅해 했습니다. 가까운 카나다에 프랑스인들이 있었기때문에 식민지인들은 영국 육군과 해군의 보호를 받을 필요는 있었습니다. 프렌취 인디언 전쟁에서 패한 뒤를 이어 프랑스인들이 떠난 다음에는 식민지인들은 더 이상 영국군의 보호를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갈수록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정부가 그렇게 하는 한가지 이유는 식민지인들이 영국의 관할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영국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외국과의 전쟁으로 영국은 큰 빚을 지게 됐습니다. 영국은 그 빚의 일부, 특히 프렌취 인디언 전쟁으로 발생한 빚의 일부를 식민지가 부담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그같은 조치에 찬성을 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그와같은 결정을 내리기전에 자신들도 발언권을 행사할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 국민들 처럼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에 대해서는 표결권이 주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를 대표해 영국 의회에 나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이 대표권 없는 납세자들이라며 영국에 항의했습니다.

1764년 영국 의회는 설탕 조례를 통과시켰습니다. 이 규정은 설탕, 커피, 포도주, 기타 대량으로 아메리카에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영국을 통해 아메리카로 수입되는 유럽 제품의 세금을 갑절로 늘려 놓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또 모든 무역 규정의 이행을 감독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에서 사용되는 지폐의 발행도 제한했습니다.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모두 이들 규정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어떻게 항의해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식민지 의회는 이들 법에 대한 항의를 승인했으나 반대하는 행동은 제각각 다르고 따라서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습니다. 사업가 그룹은 상품 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1765년에 또 다른 세금제도, 즉 인지세를 제정할때까지 그것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인지세는 그전까지 제정된 어떠한 세금제도보다 식민지인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이 법은 식민지인들에게 어떤 인쇄물이든 영국의 인지를 사서 부착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문, 문서, 심지어 카드 놀이에 사용되는 카드 한장 한장에도 모두 인지세를 물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이 세금을 내기 거부했습니다. 식민지 의회는 영국 의회가 식민지인들에 대해 어떠한 세금 제도도 만들 권리가 없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극도로 분개한 식민지인들은 영국 인지 사무소를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식민지인들이 그토록 분개한 최대 이유는 대표권 없이는 세금도 없다는 주장을 영국이 받아들이지 않은데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식민지인들중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식민지의 통치를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 국민으로써의 권리를 누리기 원했습니다. 이들은 인제세야말로 여러가지 세금 제도중 가장 극도로 식민지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인지세법을 따르기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영국 상품 구입도 거부했습니다. 거의 천개의 업체들이 영국 상품 수입 금지에 합의했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영국 상인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따라서 이들은 영국 의회에 그 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의회는 1766년에 그 법을 폐지했습니다. 식민지들은 즉각 영국 상품 거부 운동을 철회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인지세법을 폐지한 바로 그날 선포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은 식민지가 본국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영국은 원하는 어떤 법도 제정할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식민지인들은 이법의 통과는 불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식민지인들로 하여금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만든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의회는 자기들이 원하는 법을 통과시킬수 있었으나, 영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그러나 식민지 의회의 역할은 자주 적인 통치 형태를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은 인지세를 취소했으나 계속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1767년, 영국 의회는 타운센드 법이라 불리우는 여러가지의 세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타운센드는 이 법을 상정한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법은, 식민지에 수입되는 유리, 차, 납, 그림, 그리고 종이등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타운센드 법을 거부하고 영국 상품을 보이코트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또 식민지내에서 이들 상품을 생산하는데 주력했습니다. 1769년에 이르러, 식민지는 영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수입품을 절반으로 줄일수 있었습니다. 또 각 식민지들은 서로간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768년, 매사츄셋즈 법원은 다른 식민지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 서한은 타운센드 법이 자연법과 식민지의 헌법 권리를 위반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 서한에 관한 소식이 런던에 알려지자, 영국 관리들은 매사츄셋즈 지사에게 의회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영국은 4천명의 병력을 매사츄셋즈 최대의 도시이자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한 보스톤에 파병했습니다. 보스톤 사람들은 영국군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영국 군인들은 거리를 장악하고 식민지인들의 집에서 침식을 했습니다. 이같은 긴장은 끝내 폭력 사태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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