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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주민들의 종적 미스테리


영국은 신세계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있어서 스페인과 공개적으로 맛서기에는 처음에는 너무 약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음 신세계의 탐험을 지원한 것은 1570년대부터였습니다.

처음 영국인으로써 정착을 시도한 인물은 험프리 길버트경이었습니다. 그는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하지는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이복 동생인 월터 랠리경은 정착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랠리 경은 북 아메리카 동부 해안 지대 탐사를 위해 여러척의 선박을 파견했습니다.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엘리자베쓰 여왕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해 새로운 땅을 버지니아(Virginia)로 명명했습니다.

1589년 약 100명의 영국인들이 노스 캐롤라이나 해안에 있는 로노크 섬(Roanoke Island)에 정착했습니다. 이들은 1년후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 다음해 또 다른 그룹이 로노크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중에는 여자와 어린이들도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랠리 경이 보낸 보급선이 현지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1590년 보급선이 현지에 도착했을때는 생존자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벌어졌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착민중 일부는 그 주변에 살던 인디언에 흡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급선이 로노크에 도착하지 못한 이유는 1588년 스페인 해군이 영국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의 필립 왕은 영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소규모 영국 해군은 강력한 폭풍의 힘을 빌어 스페인의 대규모 함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스페인은 더 이상 영국의 탐사 활동을 저지할수 없게 됐습니다. 영국은 그토록 멀리 떨어진 정착지에 보급을 해준다는 것이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엘리자베쓰 여왕은 더 이상 보급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사망한 1603년까지 신대륙 탐사는 중단됐으나, 그 뒤를 이어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 노력이 재개 됐습니다.

1606년 새 영국왕 제임스 1세는 두개의 회사에게 당시 영국령으로 돼있던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할수 있는 허가를 내렸습니다. 허가를 받은 런던 회사는 1606년 100명의 영국인들을 버지니아로 싣고 왔습니다. 이들은 1607년 5월에 상륙해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는 마을을 건설했습니다. 신대륙에서 영국인의 영구적 식민 도시가 세워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식민지는 처음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착민들은 시기에 맞게 씨앗을 뿌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머지않아 양식이 바닥이 났습니다. 정착민들은 새 땅에서 생존하기 위한 건설 기술이나 농사 기술이 부족했습니다. 첫번째 겨울에 정착민의 절반이 사망했습니다.

런던에서 식민지를 관리하던 회사의 기업인들은 그같은 처녀지에서의 생존에 대해 아는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착민들이 금을 찾기를 원했고, 현지의 강을 통해 동방으로 가는 통로를 찾기 희망했습니다. 정착민중의 한 사람은 그것이 한갖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바로 죤 스미스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정착민들이 현지 인디언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집을 짖고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은 질병과 기근, 인디언의 공격등으로 매년 죽어갔습니다.

런던 회사는 1606년에서 1622년까지 6천명을 버지니아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중에 사망한 정착민은 4천여명이나 됐습니다.

역사가들은 현지의 포우하탄 (Powhatan)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착민들은 모두 사망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정착민들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숲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포우하탄은 새로운 곡식을 심는 방법과 집을 짓기 위해 임야를 정리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착민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도 정착민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1622년 인디언들은 자기들의 땅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정착민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로인해 340명의 정착민들이 사망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그 보복으로 버지니아 해안 지대에 사는 인디언 종족을 파괴했습니다.

정착민들은 차츰 영국이나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 식량을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1624년 까지 제임스타운은 확고한 식민지로 구축됐습니다. 이때부터는 새로운 작물인 담배를 경작하고 팔아서 돈도 벌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북 아메리카의 초기 영국 정착민들은 버지니아보다 훨씬 북쪽 지금의 매사츄세스주에서 터를 잡았습니다. 이곳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온 자들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정착민들은 영국의 사업가들이 돈을 벌려는 목적에서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사츄세스주 정착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영국왕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의 딸 엘리자베쓰 여왕은 영국에 개신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교단은 영국의 교회, 즉 앵글리칸 쳐치(Anglican Church)로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거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개신교도들이앵글리칸 쳐치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앵글리칸 쳐치에서 떨어져 나가 자신들의 교단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1606년 스크루비라는 도시에서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약 125명의 영국인들은 영국을 떠나 네델란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문제에 봉착하자 이들은 신 천지로 건너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필그림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인 목적을 갖고 이동을 했기 때문에 순례자라는 의미의 필그림으로 불리우게 된것입니다. 1620년 메이훌라워(Mayflower)로 불리우는 선박을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 가운데는 35명의 필그림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메이훌라워(Mayflower)는 버지니아에 닿지 못하고 대신 북쪽인 케입 카드 만(Cape Code)에 도달했습니다. 탑승자들은 제임스타운을 찾는대신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메이훌라워 호를 타고온 사람들은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 규칙을 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들은 버지니아에 상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국 국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메이훌라워 콤팩트(Mayflower Compact)라고 불리우는 통치계획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신대륙에서 맨 처음 만들어진 관리 규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윌리암 브래드포드 라는 사람을 플리머스 식민지로 불리우는 지역을 통치할 지사로 선출했습니다.

제임스타운에서 그랬던 것 처럼 플리머쓰 정착민들도 첫해 겨울에 절반이 사망했습니다. 생존자들은 놀랍게도 영어를 할줄 아는 인디언들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콴토(Squanto)였습니다. 그는 다른 인디언들과 함께 영국 선장에 끌려가 영국에서 살다 돌아온 사람이었 습니다. 필그림들은 스콴토가 신이 자신들을 위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콴토는 필그림이 토착 인디언들과 의사 소통을 할수 있게 도왔습니다. 그는 필그림에게 고기 잡이가 가장 쉬운곳, 심어야 할 곡식과 그 농작물을 기르는 방법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필그림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정착민들은 11월 추수때 인디언들을 초청해 음식을 함께 들고 스콴토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때의 행사를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오늘날 뉴 잉글랜드로 불리우는 이 지역에 다른 영국인들도 정착했습니다. 그중의 큰 집단은 퓨리탄(Puritan)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필그림처럼 퓨리탄도 영국 교회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러나 영국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들은 믿음을 더욱 성스럽게 변화시키기 원했습니다. 변화에 대한 그같은 열망으로 이들은 영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퓨리탄을 태운 첫 배가 영국을 떠난것은 1630년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이 다 갈 무렵에는 천명이 넘는 퓨리탄들이 신 대륙의 북동부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영국의 새 국왕이 된 챨스 왕은 이들에게 매사츄셋즈 베이 지역에 살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퓨리탄은 대규모로 영국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630년에서 1640년 사이 2만명이나 되는 퓨리탄이 뉴 잉글랜드로 항해했습니다. 위험한 이 항로에 이들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믿음대로 살수 있는 곳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퓨리탄은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퓨리탄과 그외 다른 유럽인들은 그러나 신세계에서 매우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들은 바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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