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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정착한 난민소녀- 마이라 다가이포 (2)


지난달 워싱턴 DC에서 미얀마인 친구들과 함께 한 마이라 다가이포(가운데).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미얀마의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인 카렌족 출신의 인권 운동가 마이라 다가이포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군부 정권의 탄압으로 집을 잃고 떠도는 내부 난민으로 태어난 마이라 씨는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형제자매와도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가족도 없이 이 마을 저 마을을 옮겨 다니고 때로는 정글에서도 여러 날을 지내야 했던 마이라 씨는, 살아남기 위해 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살윈 강을 건너게 됐는데요. 당시 마이라 씨는 10대 후반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유엔난민기구(UNHCR)의 도움으로 태국 정부가 인정하는 카렌족 난민촌이 세워졌습니다. 전 거기서 수년을 살았는데요. 수십 년씩 대를 이어 살아오는 난민들도 있었죠. 유엔난민기구로부터 정식으로 난민증을 받았고 또 여러 구호 물품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카렌 난민촌 사람들은 일정 기간 지나고 나면 난민신청을 할 수 있었어요. 신청서를 작성하고 보안 심사와 건강 심사 등을 거친 후 어디로 가게 될지 유엔난민기구가 결정했습니다. 주로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나라가 최우선이었는데요. 제 경우에는 미국에 있는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2004년에 미국에 난민으로 오게 됐습니다.”

[음악: New York, New York]

마이라 씨가 처음으로 밟은 미국 땅은 다름 아닌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이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세계 곳곳의 이민자가 모여 사는 뉴욕은 기회와 자유의 땅이었지만,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홀로 살아가기에 만만하지 않은 도시였는데요. 마이라 씨에게 가장 힘든 건 뭐였을까요?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태국 난민촌에서 학교에 다니긴 했어요. 하지만 정식 학교는 아니었죠. 졸업증이나 자격증을 주지도 않았고,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학교였어요. 그래도 저는 난민촌에서 국제 구호단체들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나름 영어를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막상 미국에 와서는 영어 때문에 엄청 고생했습니다.”

미국에 오자마자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마이라 씨, 정글에서 살아남았던 것처럼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기가 시작됐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미국에서 첫해는 힘들었습니다. 뉴욕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분주하고, 물가도 비쌌죠. 그래서 식당에서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생활이 쉽지 않았어요. 강의를 정말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결국 녹음기를 들고 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교수님께 허락받고 수업 내용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집에서 수십 번 들으면서 복습했습니다. 교과서도 너무 두꺼웠어요. 하루에 20~30장은 읽어가야 하는데 밤새 5장도 못 읽은 날도 있었습니다.”

마이라 씨에게 더 힘든 건 바로 미국의 독특한 수업방식이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제일 힘든 건 토론수업이었어요. 미국엔 토론수업이 많은데 저는 영어를 잘 못 하니까 토론 수업이 불가능했죠. 토론이 성적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토론에 참여 못 하는 걸 어떻게든 메꿀 수 있게 해달라고 교수님께 간청했습니다. 다행히 교수님들이 제게 기회를 주셨죠. 토론 대신 미얀마 정치나 경제, 이런 주제에 대해 발표를 하는 식으로 대체해서 학점을 잘 받을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힘들어도 다른 방법이 늘 있었고, 또 도움의 손길이 있었죠. 저는 무엇보다 늘 긍정적으로 상황을 이겨나갔는데요. 이런 자세가 미국 정착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처음엔 커뮤니티 칼리지라고 하는 2년제 지역전문대학을 다녔던 마이라 씨는 2년 후에 4년제 대학에 편입해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권 운동가로 미국 전역을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데요. 마이라 씨는 미국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에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사람마다 다 사는 목적이 다르니까요. 돈을 위해 사는 사람, 또는 명예를 위해 사람도 있죠. 미국은 삶의 목적이 무엇이든, 노력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기회의 나라라는 게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에요. 저는 강연 등을 통해 먹고 살만큼은 벌고 있고 또 이에 만족합니다. 돈이 제 인생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만약 돈을 벌기 원했다면 더 많이 벌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마이라 씨는 그러면서 자신이 목격한 아메리칸 드림 성공담을 나눴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제가 처음 뉴욕에 정착할 당시에 늘 오가는 길에서 채소 몇 가지를 파는 중국인 행상이 한 명 있었어요. 이 아주머니는 “1달러 99센트, 헬로, 땡큐” 딱 이 3마디만 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3~4년이 지난 후에 가 보니까 그 아주머니가 사라졌더라고요. 알아봤더니, 세상에, 그 행상 아주머니가 몇 년 사이에 돈을 벌어서 바로 그 길가에 중국인 식당을 차렸더라고요. 영어를 못해도, 돈이 없어도, 인내하고, 노력하면 또 도전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음: 마이라 씨 친구들 모임]

인권 운동가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가고 있는 마리아 씨, 친구들이 보는 마이라 씨는 어떤 사람일까요? 마이라 씨와 마찬가지로 카렌 족 출신으로 마이라 씨를 오랫동안 봐왔던 친구 웨이 오스틴 씨는 친구 마이라 씨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녹취: 웨이 오스틴] “마이라는 착하고, 친절하고 또 정이 많아요. 그리고 알고 보면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랍니다. 사석에선 이렇게 조용한 친구가 인권 운동가로, 또 강연자로 활동하는 게 사실 좀 신기하기도 해요.

웨이 씨는 그러면서 마이라 씨에 대해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녹취: 웨이 오스틴] “마이라는 카렌 족 출신이지만, 미얀마에서 내부 난민으로 떠도는 다른 소수 민족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요. 카렌인들만을 위해 활동하지 않죠. 난민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마이라 씨, 어떻게 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인권 운동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글쎄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사회운동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말하는 걸 좋아했죠. 내가 경험한 것, 말해야 하는 것들을 꼭 사람들에게 말하고 알렸습니다. 전 미국에 온 지 3년 만인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유엔 관련 비영리단체(NGO)에서 일했고요. 또 그때 마침 ‘미국 버마 운동(US Campaign for Burma)’이라는 미얀마 인권 단체가 생겼고, 미얀마 난민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이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이 단체의 정책국장인 마이라 씨는 카렌계 미국인 협회 의장의 자리에도 올랐는데요. 미얀마의 난민 문제를 위해 지역 사회는 물론이고, 연방 의회까지 드나드는 열혈 인권 운동가 됐습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미얀마 출신 인권운동가 마이라 다가이포 씨의 두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마이라 씨의 인권 운동 활동에 대해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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