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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따라잡기] 시몬 페레스


바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30일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엄수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해 관에 손을 얹고 있다.

바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30일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서 엄수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해 관에 손을 얹고 있다.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 수요일(28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의 국장이 오늘(30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거행됐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페레스 전 대통령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이스라엘 역사의 산증인이자 정치 거목이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입니다.

“폴란드에서 보낸 유년 시절”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1923년, 지금은 벨라루스 땅인 폴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이츠하크와 사라 페레스키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페레스의 아버지는 성공한 목재상이었고요.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습니다. 페레스의 할아버지는 저명한 랍비(rabbi), 즉 유대교 율법 선생이었는데요. 페레스는 유년 시절 할아버지 집에서 성장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가 아니었는데요. 한번은 부모가 안식일에 라디오를 듣자 어린 페레스가 라디오를 부숴버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었죠.

1932년 페레스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이 위임 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금의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이주했고요. 나머지 가족들은 2년 뒤 합류하는데요.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후 부모는 성을 '페레스키'에서 '페레스'로 바꿨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1세대”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은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몇 년간 유대인 집단 공동체인 ‘키부츠’에서 생활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에는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일대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신이 약속한 거룩한 땅으로 묘사돼 있는데요. 유대인들은 이 곳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른바 시오니즘 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10대 때부터 시오니즘 운동에 뛰어든 페레스는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던 ‘마파이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하면서 탁월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요.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되는 '데이비드 벤 구리온'의 눈에 띄어 23살의 젊은 나이에 당 비서로 임명됩니다. 이후 이스라엘군의 전신인 ‘하가나(Haganah)’에서 인사와 무기 관리를 담당한 페레스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에는 해군 총장에 임명돼 1차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1952년에는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는데요. 29살 최연소 국방 차관이었습니다. 페레스 전 대통령은 이 시기, 이스라엘 국가 확립에 중요한 무기 구매와 전략적 동맹 관계 구축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대량 무기를 확보하고, 항공 산업의 기반을 닦는 등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네게브 사막에 핵발전소 설립을 주도한 것도 페레스 전 대통령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페레스 전 대통령을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1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치의 산증인”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은 1959년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 의원으로 처음 선출된 이래 교통부 장관, 정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 무려 60여 년간 이스라엘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스라엘 정치의 산증인이었습니다.

1977년 당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비리에 연루돼 물러나면서 총리직을 대행한 것을 포함해 모두 3차례나 총리직을 수행했고요. 2007년에는 만 83살의 고령에 이스라엘의 제9대 대통령에 당선돼 4년간 전 세계 최고령 국가 수반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 쓰기를 좋아했던 페레스 전 대통령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 인터넷 사회연결망 SNS를 개설해 활발하게 글을 올리는 등 노익장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강경파에서 평화주의자로 변신"

젊은 시절 4차례나 중동 전쟁을 치를 만큼 무력 충돌도 불사했던 페레스 전 대통령은 1984년 총리가 된 후부터 온건 노선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는 반드시 전쟁해야 하지만 , 평화를 추구할 때는 평화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신념때문이었는데요. 1985년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킨 일이나 요르단과의 평화 합의, 특히 도무지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정을 도출한 것 등은 다 그의 이런 신념이 일궈낸 성과들입니다.

“오슬로 협정의 주역”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바로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인 공존 가능성을 제시한 ‘오슬로 협정’을 성사시킨 일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영토 싸움을 벌였고, 양측의 갈등으로 중동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는데요. 하지만 페레스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외무장관으로 있을 때, 당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지도부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협상 장소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였는데요. 페레스 당시 외무장관은 이스라엘과 오슬로를 오가면서 약 8개월간 협상을 주도해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 수립과 운영에 동의하고 외부의 간섭 없는 자치 활동을 인정하기로 했고요.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행위를 중단하기로 약속합니다.

[녹취: 오슬로 협정 서명식]

1993년 9월 미국 백악관에서 있었던 오슬로 협정 서명식에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수반의 연설 잠시 들으셨는데요. 오슬로 협정의 주역들인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그리고 양측의 협상을 주도했던 페레스 당시 외무장관 3명은 이 공로로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평화주의자"

"이스라엘의 마지막 평화주의자", "이스라엘 평화의 전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 "이스라엘의 어른", "이스라엘의 국부",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하는 주요 언론들의 표현들입니다.

[녹취: 페레스 전 대통령 201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이 지난 2012년 바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 최고 상훈 가운데 하나인 ‘미국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을 당시의 육성 들어보셨는데요. 바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페레스 전 대통령을 친구라고 부르면서 페레스 전 대통령은 인류 역사의 길을 바꾼 인물이라고 애도했습니다.

시몬 페레스 전 대통령의 시신은 30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헤르츨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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