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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6주년...미 참전용사, 포로수용소 1천일 회고


미군 네트워크(AFN)가 제작한 참전용사 아든 로울리(Arden Rowley)씨 영상 인터뷰의 한 장면.

미군 네트워크(AFN)가 제작한 참전용사 아든 로울리(Arden Rowley)씨 영상 인터뷰의 한 장면.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5일로 66주년이 됩니다. 북한 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여 동안 수 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많은 이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북한 군과 중공군에 체포돼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미군 포로들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포로로 잡혀 무려 33개월 만에 풀려났던 미군 참전용사 아든 로울리 (Arden Rowley) 씨의 회고를 통해 전쟁을 되돌아보겠습니다. 미군 네트워크(AFN)가 제작한 인터뷰 영상을 참고해 김영권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녹취: 로울리 씨] “Very emotional……when you think 60 years ago….”

지난 2013년 7월 휴전선 인근 문산에 있는 자유의 다리. 팔순의 미국 노병이 다리를 쳐다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흐느낍니다.

당시로부터 60년 전인 1953년, 이 노병은 푸른색 포로복을 입은 채 러시아제 트럭을 타고 이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넘겨졌습니다.

5개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 무려 2년 9개월, 1천 일을 보낸 뒤에야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겁니다.

노병의 이름은 아든 로울리. 올해 86살인 그는6.25전쟁 발발 두 달 뒤인 1950년 8월, 미 제2보병사단 소속으로 참전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라울리 씨는 소대장의 지프차 운전병으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습니다. 그리고 압록강까지 지프를 운전하며 한반도를 종단했습니다.

[녹취: 로울리 씨] “I was a actually driver. I drove a jeep…”

하지만 중공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미처 퇴각하지 못한 채 12월 1일 청천강 근처에서 포로가 됐습니다.

로울리 씨는 이후 24일 동안 밤에만 이동하면서 눈보라가 매섭게 부는 산골을 지나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첫 포로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수용소 환경은 너무도 열악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이질 같은 전염병이 돌면서 불과 몇 주 만에 전우 300 여 명이 숨졌습니다.

숨진 전우들의 시신을 계속 땅에 묻어야 했고, 여러 전우들은 동상에 걸려 꽁꽁 얼어붙은 발을 수술 칼도 없이 그저 큰 가위로 잘라내야 했습니다.

이듬해 두 번째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환경은 좀 나아졌지만 이번에는 정신적인 고통이 시작됐습니다.

[녹취: 로울리 씨] “The Chinese brought in English speaking instructors and tried to convince us…”

중공군이 영어를 구사하는 강사를 데려와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세뇌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이런 세뇌교육은 무려 16개월 간 거의 매일 반복돼 포로들의 심신을 지치게 했습니다.

로울리 씨는 당시 세뇌교육을 잘 따르면 중공군이 식량과 담배 등을 더 지급했기 때문에 많은 전우들이 생존을 위해 계속 참여해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런 치열한 생존싸움을 하며 5개 수용소를 전전한 뒤에야 로울리 씨는 1953년 8월18일 드디어 자유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었습니다.

로울리 씨는 문산 `자유의 집’에 도착해 처음 먹었던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합니다.

[녹취: 로울리 씨] “Very first thing I ate when we got the Freedom Village…”

로울리 씨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 한동안 한국을 되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긴 포로생활과 전우들의 죽음, 폐허로 변한 한반도는 그에게 그리 좋은 추억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까지 겪어 자신과 주위를 힘들게 하기도 했었다고 회고합니다.

미국에 돌아온 뒤 국경수비대에 재입대해 1974년 소령으로 제대했지만 로울리 씨는 6.25전쟁 참전용사협회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내의 권유로 1983년 우연히 참전용사협회에 참석한 뒤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 그리고 한국의 발전상을 들으며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녹취: 로울리 씨] “It’s great feeling to know that I was a part of helping…”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서 구하는 데 일조를 했을 뿐아니라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참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겁니다.

로울리 씨는 이후 한국전쟁 전도사가 됐습니다. 학교 교사와 역사가로 활동하며 한국전쟁과 자신의 포로생활을 담은 책을 여러 편 집필했습니다.

또 6.25참전용사협회의 활동을 주도하며 전우들과 한국을 여섯 번이나 방문했습니다.

로울리 씨는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1994년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합니다.

[녹취: 로울리 씨] “There was tremendous changes. I was absolutely amazed…”

수많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과 한국이 어떻게 41년 만에 그처럼 엄청난 변화를 했는지, 그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는 겁니다.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 뿐아니라 거리를 활기차게 다니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고등학교 등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남북한이 전쟁 뒤 어떻게 확연하게 달라졌는지 한반도를 촬영한 야간 위성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로울리 씨] “I have chance to talk to…high school classes…”

남북한의 달라진 모습과 자신의 포로체험을 통해 느낀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다음 세대가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로울리 씨는 그러면서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 새겨진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녹취: 로울리 씨] “The slogan at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Freedom is not free…”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분명 ‘승리한 전쟁’이란 겁니다.

로울리 씨는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지키다 전사한 전우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내 옆에 있던 전우는 숨졌고 나는 살았습니다. 왜 그는 죽고 나는 살았나요? 내가 만약 수용소에서 숨져간 전우들을 잊는다면 그 것은 그들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 순간 전우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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