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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이모 고용숙 미 언론 인터뷰 "김정은 8살 때부터 후계자 대우"


생모로 알려진 고용희 씨(왼쪽)와 함께 있는 어린 시절 김정은. (자료사진)

생모로 알려진 고용희 씨(왼쪽)와 함께 있는 어린 시절 김정은. (자료사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모 고용숙 씨 부부가 북한에서의 생활과 미국 망명 이후의 근황을 미국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김정은의 어린 시절과 자신들의 망명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언젠가 김정은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기대를 밝혔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의 이른바 ‘로열 패밀리’로 알려진 고용숙 씨는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 고용희 씨의 여동생입니다.

고 씨와 남편 리강 씨는 27일 미국 ‘워싱턴포스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이미 8살 때 김정일 정권의 후계자로 간주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1992년 북한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김정은의 8살 생일 때 별 계급장이 달린 장군 제복을 선물 받았으며, 그 때부터 군 장성들이 어린 김정은에게 경례하면서 경의를 표했다는 설명입니다.

고 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김정은이 평범하게 성장하기 불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김 위원장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82년 혹은 1983년생이 아니라 1984년생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어린 시절부터 게임이나 기계 장치를 좋아했고, 배나 비행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고 씨는 김 위원장이 말썽꾸러기는 아니었지만 성미가 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어머니가 놀기만 하고 공부를 안 한다고 야단치자 말대꾸를 하는 대신 단식투쟁을 하곤 했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1992년 김 위원장의 형인 김정철과 함께 스위스 베른에서 살기 시작한 고용숙, 리강 부부는 김 위원장이 12살 때인 1996년부터 2년간 김 위원장을 보살폈습니다.

고 씨는 스위스에서 보통 가족처럼 살았고 김 위원장 형제의 어머니처럼 행동했다며, 김 위원장에게 보통 아이들처럼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올 것을 권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해외 거주의 특혜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고 씨는 김 위원장 형제를 당시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놀이시설인 유로디즈니랜드 리조트에 데려갔다고 말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와 관련해 고 씨의 사진첩이 스위스의 알프스 스키장, 프랑스의 유명 휴양지 리비에라 해변, 이탈리아의 야외식당에서 김 씨 형제와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고 전했습니다.

고 씨는 김 위원장이 여름에 북한으로 돌아가 해안가에 있는 원산의 대저택이나 영화관과 많은 방이 딸린 평양의 거처에서 지내는 걸 좋아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또래보다 키가 작았던 김 위원장에게 어머니가 농구를 하면 키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며, 그가 농구에 빠져 농구공을 갖고 잠들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고용숙, 리강 부부는 암에 걸린 고용희를 치료할 길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에 오게 됐다며, 고용희를 살리는 것이 탈북의 동기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의 부모가 모두 사망했을 때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역시 갖고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고 씨는 강력한 지도자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역사에서 종종 볼 수 있다며, 그런 종류의 곤경에서 떨어져있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들 부부가 1998년 스위스 베른의 미국 대사관으로 진입해 망명을 신청했고, 며칠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미군 기지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몇 달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가족 관계를 털어놨다고 전했습니다.

리강 씨는 북한 정권의 최측근 부부로부터 많은 ‘비밀’을 듣고자 한 미국 정보기관의 기대와 달리 자신들은 별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린 김 위원장 형제를 돌보고 공부를 시키면서 그들의 사생활을 많이 들여다봤을 뿐 핵이나 군사 비밀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고영숙, 리강 부부는 이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워싱턴 DC 인근에서 지내다 한국 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작은 도시에 거처를 정했지만 한인들의 계속되는 질문 때문에 한인은 물론 아시아계 주민들도 거의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건축이나 집 수리 등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별로 없는 직업을 전전한 리 씨는 초기에는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힘든 생활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 부부는 2남 1녀를 구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수학자가 됐고 작은 아들은 부모의 사업을 돕고 있으며 딸은 컴퓨터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워싱턴포스트’는 리 씨가 여전히 북한 정권에 동조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며 평양을 방문하고 싶어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 부부 모두 조카를 거듭 “김정은 원수”로 부르며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리 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종 목표라며, 미국과 북한 모두를 이해하는 자신이 양국 간 협상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또 김 위원장이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라면 그를 만나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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