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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대혁명


지난 1966년 5월 16일 중국의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에 참가한 청년들이 행진하고 있다.

지난 1966년 5월 16일 중국의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에 참가한 청년들이 행진하고 있다.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 5월 16일은 중국 문화 대혁명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도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행사는 없었습니다. 다만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이날 밤 느지막이 ‘문화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는 요지의 논평만 발표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중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인 ‘문화대혁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문화 대혁명의 개요”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흔히 줄여서 '문화혁명' 또는 '문혁'이라고 하는데요.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 문화 대혁명’입니다. 문화혁명은 1966년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주창으로 시작된 사회주의 운동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추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마오쩌둥은 문혁이 시행된 지 3년만인 1969년, 문혁 종료를 공식 선포했는데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관련자들의 체포, 숙청으로 이어진 10년간의 시기를 문혁 기간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혼돈과 폭력으로 얼룩져 내전과도 같았던 이 시기를 ‘십 년 대동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문화대혁명 태동 배경”

잘 아시다시피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은 1949년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의 주도 아래 수립됐습니다. 마오쩌둥은 이후 공산주의에 입각한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했는데요. 하지만 식량 자급자족과 철강 증산 등을 목표로 1958년부터 2년간 실시한 ‘대약진운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경제적 대위기가 찾아왔고, 마오쩌둥은 힘이 급격히 약화됩니다. 결국 국가 주석직까지 내놓게 되는데요. 하지만 마오쩌둥은 새 공산당 지도부가 공산 이념에서 벗어나 수정주의를 채택하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 아내 장칭과 린바오 국방장관 등 급진 세력을 결집하고 홍위병의 비호 속에 다시 권력 장악에 나서게 됩니다.

“홍위병의 탄생”

중국의 문혁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홍위병’입니다. 홍위병은 홍색 정권, 즉 공산 정권을 보위하는 병사들이라는 뜻인데요. 문혁의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다면 마오쩌둥을 비호한 세력이 바로 홍위병입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충성하거나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학생과 지식인 등 젊은층을 중심으로 불만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공산 혁명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재산을 갖고 있거나 당 간부직을 자녀에게 세습하는 일들이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베이징 대학교의 한 교수가 온건 성향의 교수들을 부르주아 반당세력, 반혁명분자라고 고발하고 이들을 척결할 것을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마오쩌둥은 이를 적극 지지했고요. 며칠 후 칭화대학교 부속 중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혁명 정신을 새롭게 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처음 '홍위병'이 결성됩니다. 이후 전국각지에서 홍위병 조직이 만들어져 같은 해 여름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 백만 명의 홍위병이 운집할 정도로 무섭게 세를 불려갔고요. 급기야 그해 8월 마오쩌둥의 주도로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문화혁명에 대한 16개 조항을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문화혁명이 시작됩니다.

“중국 암흑기와 하방 운동 ”

전국의 홍위병들은 마오쩌둥 주의를 찬양하고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 낡은 인습을 타도하기 위해 대대적인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불상 같은 문화유물과 유적이 문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됐고요. 반혁명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은 홍위병이 주도하는 집회에 끌려 나와 공개적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관리와 학자, 지식인들이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관직에서 물러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지방을 발전시킨다는 이유로 이른바 '하방 운동'이라는 것을 펼쳐 수많은 사람이 변방으로 쫓겨나갔는데요. 시진핑 현 국가 주석도 그런 피해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시 주석의 가족들은 문화 혁명 당시 기득권 세력으로 몰려 시골로 쫓겨가 토굴 같은 곳에서 몇 년간 힘겨운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3년만인 1969년에 문화대혁명의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인 장칭과 3명의 측근으로 이뤄진 이른바 ‘4인방’ 또는 ‘4인배’가 실세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문화 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마침내 끝나게 됩니다.

이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적게는 몇만 명에서 많게는 2천만 명에 달할 거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인데요. 당시 중국이 폐쇄적인 공산국가였던 데다가 자살하는 사람까지 속출하던 사회 분위기상 정확한 집계를 산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고개를 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향수”

1981년, 중국 공산당은 "문화 대혁명은 당과 국가, 인민에게 큰 혼란과 재앙을 가져다준 중대한 오류"라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해왔습니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과 논란은 자칫 중국 공산당 창건의 아버지,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 개인을 넘어 공산당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중국에서 문화 혁명 시대에 대한 향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경제 성장이 둔화하고,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극단적 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56개의 꽃'이라는 이름의 중국 소녀집단이 지난 5월 초,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불렀던 노래를 불러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결국 해마다 문화대혁명 기념일이 돌아와도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국 당국은 올해는 공산당 기관지를 통해 “역사는 문혁이 이론과 실제에서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했다면서, 다시는 문혁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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