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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레이건 여사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 (자료사진)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 (자료사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미국의 40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지난 6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전직 영화 배우답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낸시 레이건 여사는 그러나 또 한편 남편을 성실히 내조한 헌신적인 아내로도 유명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 낸시 레이건 여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국의 40대 퍼스트레이디 낸시 레이건 여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부모와 헤어져 산 유년 시절”

낸시 레이건 여사는 192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낸시 레이건 여사의 원래 이름은 앤 프랜시스 로빈스이고요. 낸시는 어릴 때 얻은 애칭입니다. 낸시 여사의 아버지인 케네스 로빈스는 중고차 판매원이었고요. 어머니 이디스 럭킷은 연극배우였습니다. 하지만 낸시 여사가 아직 아기였을 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낸시 여사는 메릴랜드에 사는 이모 집에서 맡겨집니다. 워싱턴 제퍼슨 대학 정치학과 제임스 벤지 교수의 도움말 잠시 들어보시죠.

[녹취: 제임스 벤지 교수] "And for the first two years in her life......."

“처음 2년 동안은 어머니 이디스가 공연하는 곳마다 낸시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극장 대기실 같은 곳에서 아이를 재우곤 했는데요. 낸시가 두 살인가 세 살쯤 되자 그런 생활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해 메릴랜드에 사는 언니 집에 낸시를 맡겼습니다. 낸시 여사는 한 5년동안 이모 집에서 자랐는데요.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했습니다."

하지만 낸시 여사가 8살 때 어머니 이디스가 로열 데이비스라는 시카고의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와 재혼을 하면서 낸시는 어머니와 다시 합칠 수 있게 됐고요. 새 아버지 덕분에 물질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게 됩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배우의 피”

낸시 여사는 연극배우였던 어머니와 연극을 좋아했던 새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여러 유명한 연극, 영화 관계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낸시 여사는 명문 여자 사립대학인 스미스칼리지에 진학해 연극을 전공했는데요. 대학 졸업 후에는 백화점 판매원, 간호 보조사 같은 일을 거쳐 29살, 여배우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에 미국 영화의 본산 할리우드로 진출합니다. 여기에는 어머니의 배우 친구들의 도움이 좀 있었습니다. 낸시 레이건 여사는 할리우드 배우 생활을 하면서 '의사와 소녀' 등 모두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요.

[녹취] 영화 'The Doctor and the Girl'

네, 영화속에 등장하는 낸시 레이건 여사의 육성입니다. 낸시 여사가 출연한 11편 모두 별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는데요. 하지만 이곳에서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 바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됩니다.

“로널드 레이건과의 만남과 결혼”

낸시 레이건 여사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1949년 무렵, 미국은 매카시즘이라고도 하는 극단적인 반공산주의 운동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낸시 여사는 공산당에 동조하는 배우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걸 발견하곤 깜짝 놀라 당시 배우협회 회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데요. 두 사람은 한눈에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한 해전 부인과 이혼한 상처가 있었던 레이건 대통령은 새로 결혼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는데요. 하지만 3년 후 두 사람은 결혼했습니다.

“정치인 남편을 위한 내조의 여왕 ”

낸시 레이건 여사는 결혼 후 몇 년 뒤 배우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 남편 내조에 지극 정성을 다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67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하는데요. 낸시 여사는 사실 남편이 정치에 뛰어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이 정해지자 최선을 다해 남편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녹취: 레이건 대통령 취임 현장]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1년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낸시 여사는 1989년까지 8년간 백악관의 안주인으로 지냈는데요. 낸시 여사는 남편에게 정치적 조언도 아끼지 않았고요. 남편 주변의 인물들을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역대 영부인 가운데 백악관 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다는 평가도 듣고 있고요. 낸시 여사의 이런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점성술사를 백악관으로 자주 불렀는데요. 이 역시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낸시 여사는 백악관에 있을 때는 마약퇴치운동 “그냥 안 한다고 말해”라는 뜻의 ‘Just Say No’ 운동에도 앞장섰고요. 백악관을 떠난 후에는 남편이 앓았던 알츠하이머 퇴치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낸시 레이건 여사에 대한 평가 “

사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임기 초, 낸시 여사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25%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인 4명 중 3명은 낸시 여사에게 별 호감을 갖지 못했다는 소리인데요. 하지만 두번 째 임기 말에는 65% 가까이 껑충 뛰었습니다. 특히 낸시 여사가 퇴임 후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보여준 헌신과 사랑은 미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울림을 남겼습니다.

[녹취:오바마 대통령] "It’s well documented the extraordinary love that she had for former…”

오바마 대통령도 낸시 여사가 힘든 시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여줬던 사랑과 헌신을 기리며 낸시 여사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낸시 여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전문가들이 매기는 역대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평가 순위에서도 올랐는데요. 1993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36위, 최하위권이었지만 지난 2014년 실시된 조사에서는 15위였습니다. 워싱턴제퍼슨 대학교 정치학과 제임스 벤지 교수의 도움말 들어보시죠.

[녹취: 제임스 벤지 교수] "Everything she did, she did it for her husband......"

“낸시 레이건이 한 일은 모두 남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퍼스트레이디에게 더 이상 뭘 더 바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퍼스트 레이디가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할 일은 남편이 최고의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거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낸시 레이건 여사가 없었더라면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남편 로널드를 만난 후에야 진정한 삶이 시작됐다고 말했던 낸시 레이건 여사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동반자였던 셈입니다.

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국의 40대 퍼스트레이디 낸시 레이건 여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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