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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 여사


미얀마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자료사진)
미얀마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자료사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해 11월 미얀마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 압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지난 1일에는 반세기에 걸친 군부시대를 끝내고 민간 주도의 민주정부로 향하기 위한 의회 개원식을 가졌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민주주의민족동맹 대표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아웅산 수치는 누구?”

아웅산 수치 여사는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걷혀가던 1945년 미얀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나이 만 70살인데요. 아버지는 영국과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이끈 미얀마의 영웅 아웅산 장군입니다. 하지만 수치 여사가 2살 때 암살당했고요. 수치 여사는 15살 때 인도 주재 대사로 발령받은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청소년 기를 보냅니다. 그리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가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요. 거기서 한 남성을 만나 결혼, 두 아들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평범한 주부에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기까지”

아웅산 수치 여사는 이후 내내 외국에서 살았습니다. 조국 미얀마가 뇌리에서 떠난 적은 없지만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1988년 아웅산 수치 여사는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미얀마를 찾았는데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겁니다. 26년간 계속되고 있는 네윈의 군사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총을 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수치 여사는 시위 군중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미얀마 건국의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딸인 수치 여사가 자신들을 위해 나서 줄 것을 원했습니다. 수치 여사는 이 사람들을 두고 남편과 자녀들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해 8월, 수치 여사는 이른바 미얀마의 8888 항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와 민주주의민족동맹”

1989년 9월 아웅산 수치 여사는 반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당을 결성하고 이름을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데요. 평범한 주부였던 한 여성이 조국의 자유를 위해 군사정부의 총칼에 맞서고 있는 모습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과 감동을 던집니다. 결국 국제사회의 중재 속에 미얀마 군사정부는 1990년 총선을 치르기로 하는데요. 이 총선에서 NLD는 80%가 넘는 압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군부는 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NLD 당원들을 무더기 체포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는 가택연금 조처를 내립니다. 이후 미얀마 군부는 10년간 NLD를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고 탄압합니다. 수치 여사는 2010년까지 모두 세 차례 가택연금을 당하는데요. 이 기간을 다 합치면 무려 15년이나 됩니다. 수치 여사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미얀마의 민주화를 촉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하는 등,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현실을 알리는 데 노력합니다. 이후 미얀마 군부는 10년간 NLD를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고 탄압합니다. 수치 여사는 2010년까지 모두 세 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하는데요. 이 기간을 다 합치면 무려 15년이나 됩니다. 수치 여사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미얀마의 민주화를 촉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하는 등,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현실을 알리는 데 노력합니다. 가택 연금 상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영국에 있는 두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는 아픔은 물론이고, 남편이 암으로 사망했을 때 임종도 보지 못하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이 때 미얀마 군부는 수치 여사의 가택 연금 상태를 잠시 풀어주고 영국 방문을 허용했지만 당국이 다시 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 철의 난초 ”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를 수식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특히 미얀마 사람들은 아웅산 수치 여사를 그냥 부르지 않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Daw 아웅산 수치’ 라고들 많이 부르는데요. Daw는 미얀마 말로 이모, 아주머니 정도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만큼 미얀마 사람들에게 아웅산 수치 여사는 친숙한 존재죠. 또 수치 여사가 가택 연금 상태 중에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버마에 갇힌 작은 새’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The Lady’가 나온 뒤로는 The Lady라는 호칭도 얻었습니다. 굴복하지 않는 정신적 투쟁을 빗대 여성 만델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요. 가녀린 외모와 기품을 본떠 공작새, 철의 난초(steel orchid)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사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외모만 보면 투사, 투쟁이라는 말이 주는 거칠고 투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녹취] 아웅산 수치 여사 미국의 소리 VOA 현지 대담

하지만 수치 여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신념이 혹독한 시간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회고했습니다.

“상징적 인물에서 마침내 현실적인 정치가로”

미얀마 군부는 2010년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을 풀어줍니다. 총선에서 승리한 새 정부가 개혁 과정을 밟고 있는 가운데 수치 여사와 NLD도 정치적 활동을 재개합니다. 2012년 4월에 실시된 보궐선거에 수치 여사는 직접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요.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 당도 44석 중 43석을 다 차지하는 압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 24년만에 처음으로 미얀마 곳곳을 방문하며 더 이상 상징적인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걸었고요. 2015년 11월 치른 총선에서 NLD 당은 압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집권당이 됐습니다.

[녹취] 미얀마 총선 보도

하지만 현재 미얀마 헌법에 따라 외국인 자녀를 둔 수치 여사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수치 여사는 집권당의 지도자로서 실질적인 국정운영을 할 거라는 의지를 밝힌 바 있습니다. 한편 미얀마 정치권에서는 최근 수치 여사가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 이상적인 평화주의자로 현실적인 정치 감각이 떨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버마와 미얀마 어느 게 맞는 국호인가요?”

청취자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어디서는 버마라고 하고, 어디서는 미얀마라고 할까 좀 헛갈려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불과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저희 VOA 방송도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라고 불렀는데요. 1988년 8월의 항쟁 후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국민적인 합의 없이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의 표시로 군사정권이 일방적으로 바꾼 미얀마라는 국호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 정부도 여전히 공식적으로 버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많은 미얀마 국민이 원하는 이름도 버마라고 하는데요. 앞으로 NLD가 집권하면 다시 버마로 국호가 바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얀마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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