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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 설 맞아 평안과 통일 염원


재미 한인 2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이산가족’의 한 장면. (자료사진)
재미 한인 2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이산가족’의 한 장면. (자료사진)

한반도는 19일 최대 명절인 설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명절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며 눈시울을 적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 세기도 훨씬 전에 이역만리 고향을 떠나온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인데요. 고령으로 대부분 숨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는 미국 내 이산가족들의 설날 표정을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녹취: 영화 국제사장 트레일러] “(절규 소리) 아버지! 손 꽉 잡으라…”

6.25 한국전쟁 시절 피난민 수 만 명의 흥남 철수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한국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을 듣고 계십니다.

지옥 같은 아비규환의 현장, 그리운 고향 땅을 떠나 남한으로 피난을 온 북한 실향민들 가운데는 다시 이역만리 미국에 정착한 이산가족들이 적지 않습니다.

미 북부 시카고에 사는 올해 85세의 서현옥 할머니는 20살 때인 1950년 12월, 어머니와 두 남동생과 함께 흥남에서 철수하는 미군 함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었던 주인공입니다.

[녹취: 서현옥 할머니] “말도 못하죠. 밤이고 낮이고 인파가 한 발자국이라도 밀리면 가족을 못 찾을 정도로 그랬어요”

6남매를 둔 서현옥 할머니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보내고 다시 어린 세 자녀가 있는 단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파에 떠밀려 배에 올라탔고 결국 가족들은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할머니의 가족들은 이후 북한에 남은 세 동생들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중개인들에게 사기를 더 많이 당했습니다.

[녹취: 서현옥 할머니] “별 짓 다해 봤어요. 하지만 대개 돈을 다 뜯기고 그러다가 말아 버렸죠.”

천신만고 끝에 연락이 닿아 서신 교환을 하고 돈도 몇 차례 보냈지만 중개하는 북한 담당자들의 금전 요구가 너무 많았습니다.

[녹취: 서현옥 할머니] “여기도 이제는 늙어서 돈을 보낼 형편도 안되고 편지를 받으면 밤낮 서두에 김일성 자랑만 하고, 돈은 제대로 받았다는 검증도 안되고 하니까 중단돼 버렸어요.”

서현옥 할머니처럼 북한에 있는 가족을 어렵게 찾았지만 북한 정부 담당자들의 지나친 금전 요구로 연락이 끊긴 이산가족들이 미국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나마 형편이 괜찮은 가족들은 북한을 종종 방문해 현지 가족이나 친척들을 돕지만 그렇지 못한 이산가족은 희망을 거의 접은 상황입니다.

지난해 미국 의회에서 상영된 재미 이산가족 관련 기록영화에는 돈이 없어 가족찾기를 포기한 한 할머니의 사연이 소개돼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녹취: 할머니] “돈이 없으니까 포기했죠, 돈이 없어서. 돈이 있었다면 포기 안 하죠. 어떻게든 찾아보지. 사람을 내세워서라도. 꿈에 한 번 북한에 갔는데 얘들이 없어요. 얘들 어디 갔나 했더니 산에 갔대요. 그런데 막 눈이 오는거야, 그래서 난 눈길을 막 헤치며 찾다가…(눈물) 꿈을 깼어요”

이따금 서신이라도 주고 받는 가족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는 이산가족들도 있습니다.

원산 출신인 김경수 전 아칸소대학 교수는 수 십 년 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북한에 남겨둔 어머니와 세 동생의 소식을 알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녹취: 김경수 전 교수] “1950년 12월 7일이야. 내가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 때부터 아직까지 소식을 몰라요”

김 전 교수는 과거 한국적십자사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신청서를 냈었지만 거부됐었다며 섭섭함을 나타냈습니다.

[녹취: 김경수 전 교수] “한국의 적십자사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할 때 저는 미 시민권을 갖고 있었죠. 제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가서 신청하려 하니까 미국 시민권자라 안 된다고 해요. 그런 법이 그…이산가족이면 참”

피란 후 부산 국제시장에서 신문 배달을 했던 의주 출신의 김웅태 할아버지는 미국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녹취: 김웅태 씨] “북에서 온 이산가족들 이제 나이가 많아가지고 이제 생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인도적 차원에서 조건 없이 만나는 것을 추진해야겠죠. 이산가족은 본인의 뜻이 아니고 국제정세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 미국이나 양심 있는 나라가 적극 도와줘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과 한국은 조건없는 이산가족 상봉을 원하고 있지만 북한 정부가 이를 정치적 사안과 연계시키고 여러 대가를 요구하면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산 출신의 김경수 전 교수는 자신의 세대가 저물면 더 이상 북한의 가족을 찾는 후손들을 보기 힘들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냅니다.

[녹취: 김경수 전 교수] “제가 옛날에는 이산가족이 1천만이라고 했는데 이제 점점 줄잖아요. 우리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형님도 돌아가시고 내가 이제 세상을 떠나면 우리 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이 평생 보지도 못한 내 동생들, 그러니까 자기 삼촌과 고모들을 찾으려고 우리처럼 노력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인권 문제죠. 이런 게 세상에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상봉을) 성사시키면 얼마나 좋을는지….”

너무 긴 세월이 흘렀는지 설날을 맞은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의외로 매우 담담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건강과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염원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녹취:서현옥 할머니] “죽기 전에 만나고 싶지요. 좋은 세월 다 보내고 이제 보지도 못하고 하니까…”

[녹취: 김경수 교수] “제가 모든 것을 다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는지 모르지만…제가 모든 것을 다 희생하더라도 다 하겠어요.”

[녹취: 김웅태 할아버지] “그저 부디 통일이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그 때까지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지내란 말을 꼭 하고 싶구요.”

[녹취: 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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