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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아이스하키리그, 탈북자 출신 황보영 선수 특집기사 실어


탈북자 출신으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간판 선수였던 황보영 씨.
탈북자 출신으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간판 선수였던 황보영 씨.
북미 아이스하키리그, NHL이 탈북자 출신으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간판 선수였던 황보영 씨를 소개하는 특집기사를 실었습니다. 자유세계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데 대해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성은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북미 아이스하키리그, NHL은 지난 5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일요일판 특집기사에서 한국의 황보영 씨의 삶을 집중조명 했습니다.

NHL은 미국과 캐나다가 결성한 100년 전통의 세계적인 프로 아이스하키 리그입니다.

NHL은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였던 황보 씨가 오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아이스하키 대사'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 대표팀의 '어머니'로 불렸던 황보 씨가 이제는 한국의 모든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어머니가 됐다고 소개했습니다.

NHL이 황보 씨의 경력에 큰 관심을 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북한에서 대표팀 선수로 활약했던 탈북자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황보 씨의 부모와 5남매 등 일가족 7 명은 지난 1997년 중국으로 탈북해 1999년 한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황보 씨는 북한에서 살던 시절 부모 모두 당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직접 디자인한 집에서 살 만큼 나름대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목숨을 건 탈북 계획을 들었을 때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의 부모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복잡한 방법으로 집을 처분하고 작은 배를 마련해 온 가족이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황보 씨는 말했습니다.

21살 때 한국에 온 황보 씨는 북한에서 12살 때부터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국가대표 선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금방 선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훈련이 끝난 뒤 한 줄로 서서 다른 선수들이 펌프질로 퍼주는 물로 한 명씩 씻어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따뜻한 물로 언제든지 샤워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황보 씨는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탈북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국의 간판 국가대표 선수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지난 2005년이었습니다. 당시 뉴질랜드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협회 (IIHF) 주최 여자 세계선수권대회 4부 리그에서 한국팀이 첫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냈기 때문입니다.

황보 씨는 한국에 입국한 뒤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 하나로 200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북한 선수들과 재회했던 때를 꼽았습니다.

남북 경기가 끝나고 북한에서 함께 뛰었던 옛 동료들에게 손을 내밀어 인사했지만 되돌아온 건 차가운 시선과 외면이었다는 겁니다.

황보 씨는 그 때문에 마음이 아파 많이 울었지만 혹시라도 자신과 대화를 했다가 북한으로 돌아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동료들을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NHL은 황보 씨가 선수로서 아시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실업계 아이스하키 환경이 척박했던 탓에 낮에는 치과기공사로 일하고 밤에는 대표팀 연습을 해야 했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2011년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황보 씨는 국제아이스하키협회(IIHF) 활동과 경기도 장애인 아이스슬레지하키 감독직을 맡고 있고,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아이스하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NHL은 황보 씨가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하고 영향력 있는 여자선수로 이름을 알리고 이제는 한국의 아이스하키 대사로 활동하게 됐다며, 이는 독재정권을 경험한 그가 자유와 기회가 주어진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아가는 놀라운 여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VOA 뉴스 이성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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