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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보도: 한국전 정전 60주년] 4. 희생으로 지킨 자유


에드워드 라우니 장군(오른쪽)과 미군 장교들이 흥남항 폭발을 지켜보고 있다.

에드워드 라우니 장군(오른쪽)과 미군 장교들이 흥남항 폭발을 지켜보고 있다.

오는 27일은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저희 `VOA'는 60주년을 맞은 정전협정을 다섯 차례로 나눠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순서로 전쟁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의 부관으로 인천상륙작전, 흥남철수작전 등에 직접 참여했던 에드워드 라우니(Edward Rowny) 예비역 중장으로부터 정전협정 당시 상황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라우니 장군을 인터뷰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당시 일본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당직을 서던 에드워드 라우니 장군은 북한 군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직접 받습니다.

올해 96살인 라우니 미 육군 예비역 중장은 63년 전을 회고하면서, 6.25 전쟁의 전세를 극적으로 바꿔놓았던 인천상륙작전을 가정 먼저 떠올렸습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Certainly the Incheon Invasion because it was so hard to get approval… 바다 배 소리…

6·25 전쟁 때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의 참모로 활약했던 에드워드 로니 장군.

6·25 전쟁 때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의 참모로 활약했던 에드워드 로니 장군.

당시 30대 초반으로 한국전 주요 전투들에 참전했던 라우니 장군이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린 건, 악조건 속에서 추진이 매우 어려웠지만 눈부신 성공을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라우니 장군은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한 맥아더 사령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Ha ha.. He was a genius. When we planned this invasion one of my colleagues we’re down at.."

"맥아더 사령관은 천재였습니다. 나와 다른 2 명의 참모들이 전투 상식에 따라 아군과 적군이 대치하고 있는 부산 인근에 병력을 투입하는 계획을 제출했지만, 그는 우리를 겁쟁이라고 꾸짖으면서 인천으로 침투하는 대담한 작전을 세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연합군이 부산까지 밀려난 상황에서 초기 수세를 극복하기 위해 병력을 적군의 심장부인 인천에 투입한 군 역사상 유례가 드문 과감한 전략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라우니 장군에게 인천상륙작전이 세계사에서 22번째로 위대한 전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혹독한 겨울 추위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뚫고 철수에 성공한 일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Weather was brutal and the Chinese were attacking and we lost as many people."

"날씨는 영하 35도를 밑돌 정도로 혹독했고,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총상으로 사망한 숫자만큼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전사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를 전후해 미군은 12 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부딪혀 철수를 결정했고, 당시 미 10군단 공병 준장이었던 라우니 장군은 비행기를 이용해 다리를 공중 투하해 퇴각로를 확보했습니다.

이 같은 작전을 통해 연합군 12만 명과 민간인 10만 명이 흥남항을 통해 해상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1951년 3월께, 38선 부근에서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과 중공군, 북한 군의 일전일퇴가 거듭되는 와중에 휴전회담이 시작됐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당시 상황이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였다고 기억합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Our orders were to maintain an agressive posture to keep trying..”

"`공세적 자세를 유지하며 북한군과 중공군을 압박하되 개별 전투 규모를 30 명, 즉 한 개 소대 수준으로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 포로를 최대한 많이 생포해 적진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도 떨어졌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이 때 적군 포로를 잡으려고 투입한 보병 소대가 집중 포격을 받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중대 병력을 투입했고, 결국 포로 2 명을 생포했습니다. 하지만 교전 규모를 작게 유지하라는 명령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휴전협정에 앞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작은 교전들이 있었지만 대대적인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휴전 협상을 참관하기도 했습니다. 협상에 참가하는 국무부와 군 동료들의 협조를 얻어 뒷자리에 앉아 세 차례 협상 진행 상황을 지켜본 것입니다.

이후 1970년대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상 SALT, '80년대 전략무기감축협상 START에 미국 측 대표로 참석한 라우니 장군은 한국전쟁 휴전 협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North Koreans were trained by the Russians on how to negotiate and they used exactly same techniques and style..”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협상술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동일한 전략을 구사했죠. 협상 대표단에 언제나 우리 측보다 한 사람을 더 넣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우리보다 높은 의자에 앉아 내려다 보며, 햇빛을 등지고 앉아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고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등의 전략을 썼습니다."

라우니 장군에 따르면 당시 휴전 협상에서는 두 가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휴전선을 어디에 설정해야 할지, 그리고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핵심 의제였다는 겁니다.

당시 연합군 측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포로 강제송환에 반대했고, 결국 최종 협정에서 귀국을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기로 합의됐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이후 1969년에서 1971년까지 한국에 다시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 군의 첫 연합부대인 미-한 1군단 초대 단장을 맡았습니다.

라우니 장군은 북한이 지난 60여년간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국지 도발을 계속하고 있는 데 대해, 독재 치하에서 심각하게 그릇된 정책 결정들이 내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Future is to get peace treaty but the question is how do you do it?”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지가 과제이죠. 유일한 방법은 북한 지도자들이 정책을 바꾸도록 하는 것인데, 중국이 북한을 설득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우니 장군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전쟁이 미국 내 일각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에게 잊혀진 것으로 느껴져 실망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라우니 중장] “Big lesson is remember that your forefathers fought hard to preserve..”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선 세대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써 싸웠다는 점, 그리고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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